고질적 병폐 불량 문제 질타… 초일류 향한 출발선"수준 미달 제품은 죄악… 회사 문 닫더라도 시정"1995년 '애니콜 화형식'… 부실 고치는 풍토 확산 계기
  • ▲ 지난 1987년 이건희 회장 취임 당시 모습.ⓒ삼성
    ▲ 지난 1987년 이건희 회장 취임 당시 모습.ⓒ삼성
    신경영 선언 이후 이건희 회장은 발빠르게 변화를 진두지휘했다. 주요 임원들을 프랑크푸르트로 긴급 소집하며 신경영을 전파하기 위한 회의와 교육을 숨가쁘게 진행했다.

    6월 24일까지 프랑크푸르트, 스위스 로잔, 영국 런던에서 이건희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와 특강이 이어졌다. 7월 4일부터는 일본에서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로 옮겨가며 8월 4일까지 회의와 특강이 계속됐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이렇게 2개월에 걸친 긴 여정을 통해 삼성의 신경영 철학은 세계화의 현장에서 제시되고 확산됐다.

    1993년 6월부터 8월 초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도쿄에 이르는 대장정을 통해 이 회장은 사장단, 국내외 임원, 주재원 등 연인원 1800여명을 대상으로 회의와 교육을 실시했다. 임직원들과 나눈 대화시간은 350시간에 달했으며 이를 풀어 쓰면 A4 용지 8500매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삼성 신경영은 이제까지 지속되었던 양 위주 경영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질을 중심으로 양이 조화를 이루는 선순환의 경영구조를 실현하겠다는 의미였다. 질 위주 경영은 신경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장은 양 위주 경영의 한계를 절감하고, 양적 사고의 결과로 생기는 불량을 고질적인 병폐라고 지적했다. 불량은 암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회사를 망하게 할 수 있는 불량의 폐해를 강조했다.

    이 회장은 ""나는 20년이 넘도록 '불량은 암'이라고 말해왔다. 위궤양은 회복되지만 암은 진화한다"며 "초기에 잘라내지 않으면 3~5년 뒤에 온몸으로 전이되어 사람을 죽인다"고 말했다. 

    이어 "삼성은 자칫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며 "암은 초기에 수술하면 나을 수 있지만 3기에 들어가면 누구도 못 고친다"고 덧붙였다.

    또한 "내 말은 양과 질의 비중을 5:5나 3:7 정도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아예 0:10으로 가자는 것이다"며 "질을 위해서라면 양을 희생시켜도 좋다. 제품과 서비스, 사람과 경영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공장이나 라인의 생산을 중단해도 좋다는 말이다"고 했다.

    삼성은 불량을 없애는 제품의 질부터 혁신을 시작했다. 생산라인을 중단시키더라도 불량을 선진 수준으로 낮추도록 했으며 한 품목이라도 좋으니 세계 제일의 제품을 만들기로 했다.

    사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인사제도를 개선하고,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조직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경영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형식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인프라를 구축하고, 사업구조를 고도화시켰다.

    삼성의 초일류를 향한 출발은 불량 추방에서 시작됐다. 삼성은 무한한 성장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량으로 인해 질적인 면에서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고, 선진시장에서도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 ▲ 지난 2010년 이건희 회장이 미국 가전전시회 CES를 방문해 3D 안경을 체험하고 있는 모습.ⓒ삼성
    ▲ 지난 2010년 이건희 회장이 미국 가전전시회 CES를 방문해 3D 안경을 체험하고 있는 모습.ⓒ삼성
    이건희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의 현주소에 대해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삼성전자고,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인 집단인 무감각한 회사"라고 질타하며, 품질에 대한 임직원들의 기본 의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품질을 최우선으로 불량을 뿌리 뽑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들이 잇달아 취해졌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라인스톱 제도였다.

    라인스톱제란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해당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과정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함으로써 문제 재발을 방지하는 혁신적인 제도다.

    생산물량이 밀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인을 세워야 하는 생산 담당자들에게는 상당한 고통이었지만, 효과는 컸다. 전자제품의 경우 1993년의 불량률이 전년도에 비해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어들었다.

    라인스톱제와 함께 질 위주로 가기 위한 삼성의 뼈를 깎는 의지를 보여 준 사례가 1995년 3월에 있었던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이다.

    당시 삼성전자의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품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하다 제품 불량률이 무려 11.8%까지 올라가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불량은 암이고, 양을 버리고 질로 가기 위해 모두 변할 것을 다짐한지 1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불량품이 나오는 것에 대해 원성이 높았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이후에도 이런 나쁜 물건을 만들고, 엉터리 물건을 파는 정신은 무엇인가? 적자 내고 고객으로부터 인심 잃고 악평을 받으면서 이런 사업을 왜 하는가"라며 "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하게 질타했다.

    1995년 1월 이건희 회장은 품질사고 대책과 향후 계획을 점검하면서 고객들에게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수거된 제품을 소각함으로써 임직원들의 불량의식도 함께 불태울 것을 제안했다.

    15만대, 150여억원 어치의 제품이 수거되었고 화형식을 통해 전량 폐기 처분됐다. 자기 손으로 힘들게 만든 제품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임직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불량품 화형식은 전 임직원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가시적 조치와 노력을 통해 '불량은 암'이라는 인식이 삼성인들 가슴속에 자리를 잡아갔고, 현장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부실 요인을 찾아 고치는 풍토가 그룹 전체에 확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