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의사 10명 중 1명은 마약류 '셀프처방''극심한 통증' 빌미로 빠져나가… 불법유통 사각지대 전 종별 의료기관서 횡횡… 신뢰 깨진 진료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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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환자가 해를 입거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겪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의술을 순수하고 경건하게 유지할 것이다. 온갖 올바르지 못한 행위나 타락 행위를 금할 것이다"라는 의사의 사명이 담겼다. 

    하지만 국내 의사 10명 중 1명은 마약류 셀프처방 경험이 있으며 이를 불법유통의 통로로 악용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처방권이라는 무기를 가진 것이 독이 된 셈이다. 그들은 의사 가운을 입으며 다짐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면했다.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따르면 의사(치과의사 포함)가 수면유도제, 항불안제, 식욕억제제 등 의료용 마약류를 자신에게 처방한 사례가 2020년 2만5884건에서 2021년 2만5963건, 2022년 2만7425건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2020년 이후 마약류 셀프처방 이력이 있는 의사·치과의사 수는 1만5505명으로 전체 의사·치과의사 14만여명의 11% 정도를 차지했다. 이 중 2062명은 2020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셀프처방 이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의사들이 자신에게 처방한 의료용 마약류는 항불안제가 37.1%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수면유도제인 졸피뎀 32.2%, 식욕억제제 19.2% 순이었다. 

    식약처는 이 기간 마약류 셀프처방 의사 61명을 점검해 의료용 목적을 벗어난 것으로 의심되는 의사 38명을 수사 의뢰했다. 이들 가운데 15명이 검찰에 송치됐으며 15명은 불송치, 8명은 수사 중이다. 

    ◆ '극심한 통증'이라는 변명 일관 
     
    의사가 셀프처방을 자행한 정황이 드러나 수사당국의 조사를 받기 시작하면 해명을 시작하는데 통상 같은 논리를 주장한다. 극심한 통증 때문에 벌어진 일로 치부하며 셀프처방과 불법유통의 연결고리를 잘라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마약성 진통제 '옥시코돈' 셀프처방으로 적발된 지방의 요양병원 의사 A씨는 척추 수술 후유증에 따른 통증이 심해 진통제가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16만정을 처방했고 모두 자신이 먹었다고 했다. 매일 복용한다면 440알에 달한다. 

    옥시코돈은 통증의 심각도, 환자의 연령, 체중 등을 감안해 일반적으로 4~6시간마다 복용할 수 있다. 해당 약제에 대한 내성이 쌓였다고 해도 셀프처방으로만 보기엔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A씨의 사건에 대해 마약류를 남용한 혐의는 인정됐지만 셀프처방 자체는 의료법상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지난 5월 기소유예를 결정했다. 

    의사들의 셀프처방은 불법유통 행위와 달리 빠져나갈 수 있는 우회로로 작용하는 상황이라 대다수는 비슷한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본인이 복용했다고 하고 환자에게 비급여 형태로 약을 제공할 수 있는 마약류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의사가 의사들 중에서도 우월한 지위를 가졌을 경우엔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때는 셀프처방이 아니라 타 의사에게 처방을 요구한 허위처방까지 문제가 확장된다. 

    지난 2018년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모 의료재단 전(前) 회장인 B씨는 마약성진통제 '페치딘'을 수천 회를 투여한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재단 소속 의사에게 처방을 요구한 정황도 확인됐다. 

    당시 그는 "3차 신경통과 복합부위 통증을 앓고 있었다. 환각이나 쾌락을 위한 마약류 투여가 아니었다"고 해명했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 신뢰 깨진 '안전한 진료환경'

    지난달 초 서울 압구정역 인근서 롤스로이스 차량을 몰다 20대 여성을 치어 중태에 빠뜨린 신모씨는 사고 당일 마약류 의약품을 투약했고 신사동 소재 C성형외과의원에서 지난 한 해에만 1600명 가까운 환자에게 프로포폴 등 마약류 의약품 투약이 이뤄진 것으로 파악됐다.

    구체적으로 지난해 디아제팜 406명, 케타민 399명, 미다졸람 398명, 프로포폴 378명 등 8종의 마약류 의약품을 환자 총 1593명에게 투약했다. 또 지난해 프로포폴 처방량은 2369개로 확인됐다.

    마약류 의약품 투약 환자 수와 투약량이 급증한 C의원과 같은 곳을 환자가 스스로 피해 가야 하는 실정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마땅치 않다.

    더군다나 불법유통과 밀접한 마약류 셀프처방이 있는 병원은 특정 전공과목이나 종별 구분 없이 만연해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최연숙 의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마약류 셀프처방 의사는 개원의사가 5415명으로 가장 많았다. 

    종합병원 1101명, 상급종합병원 701명, 병원 499명, 치과병원과 치과의원이 226명, 공중보건 의료업 122명, 요양병원 114명, 한방병원 59명 등 전 종별에 있었다. 

    특히 상급종합병원의 셀프 처방 의사 수는 2020년 622명, 2021년 546명, 2022년 701명, 2023년 5월 기준 416명으로 연평균 669명이었다.

    서울의 한 유명 대학병원 1곳에서만 2020년 114명, 2021년 79명, 2022년 99명, 2023년 5월 기준 49명의 의사가 셀프 처방을 한 사실도 확인됐다.

    대학병원 1곳당 수련의와 전공의를 포함해 대략 500여명의 의사가 근무하는 것을 감안하면 해당 병원에서는 의사 5명 중 1명 꼴로 마약류 셀프 처방을 하는 셈이다.

    최 의원은 "국립대병원을 대상으로 확인한 결과 병원 전산시스템으로 마약류 셀프처방을 자체적으로 막은 병원은 서울대병원과 부산대병원, 양산부산대병원 등 일부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