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임종룡 우리금융그룹 회장ⓒ우리금융
    ▲ 임종룡 우리금융그룹 회장ⓒ우리금융
    금융은 흐름입니다. 막힌 데 없이 구석구석 흘러가야 합니다. '이승제의 금융通'은 국내 금융권에서 일어나는 돈과 정보의 흐름을 좇아가려는 시도입니다. 딱딱한 형식주의를 벗어나 금융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고자 합니다.  

    #2023년 3월. 임종룡 우리금융그룹 회장은 첫 출근하면서 윤종규 전 KB금융그룹 회장을 떠올렸어야 했다. 어쩌면 이미 그의 머릿속엔 윤 전 회장에 대한 각종 데이터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금융에게 KB금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벤치마킹 모델'이다.  두 그룹은 닮아도 너무' 닮았었다.'[과거형에 주목해 달라!] 

    두 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주인 없는 금융사'로 새로운 활로를 열어야 했다. 인사권을 전적으로 행사하는 주인이 없다 보니, 반복적으로 계파 간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우리은행의 한일·상업은행 출신처럼 국민은행에도 '1채널(옛 국민은행 출신)' '2채널(옛 주택은행 출신)'로 나뉘며 서로를 적대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통합 국민은행(현 KB국민은행)의 경우도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처럼 비슷한 덩치의 은행이 합쳐진 사례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압도하지 못한 합병이었다. 두 은행의 비극은 여기서 비롯한다. 왕(주인)도 없고, 고만고만한 세력들이 병치되니 자연스럽게 중세 봉건시대 유형의 '분할 통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KB금융도 출범 초기부터 거센 외풍에 시달렸다. 우리은행과 달리 공적자금을 받진 않았지만 국책은행이란 태생 때문에 출범 첫 해인 2001년 말 기준 정부가 9.84%의 지분을 지닌 최대주주였다. 

    KB금융의 외풍은 보다 노골적이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합병 이후 6명의 회장 중 양종희 현 회장 만이 내부(주택은행) 출신이다. 이전 면면을 살펴보면 지금의 KB금융이 일정 정도의 독립성을 확보한 게 신기할 정도다. 이명박 정부 시절 '금융권 4대 천왕' 중 한 명으로 불리던 어윤대 전 회장, 이헌재 사단으로 분류되던 황영기 전 회장, 경제 관료 출신인 임영록 전 회장 등이 정권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그러다 터진 '회장과 행장의 격돌'은 이전투구 양상으로 번졌다.  2014년 '주전산기 교체 사태'는 명칭 만큼이나 황당함으로 점철됐다. 합병 은행의 주전산시스템 교체를 놓고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차관을 지낸 임영록 회장과 한국금융연구원 출신 이건호 행장이 정면충돌했다. 각종 외풍과 낙하산으로 얼키고설킨 그물망에 KB금융이 통째로 걸려든 것이다. 

    이 사태는 워낙 구체적이고 동시에 매우 모호해서 지켜보는 이들을 당혹케했다. IBM 프레임을 유닉스 것으로 바꾸려던 계획은 철회됐고 임 회장과 이 행장은 동반사퇴했다. 매듭이 꼬이다 못해 꽁꽁 묶여 결국 단칼에 자르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하기 마련이다. 최악을 거치니 기회가 찾아왔다. 이 사태는 변신의 밑거름이 됐다. 이대로 가다간 동반 몰락하고 말 거란 두려움, 생존하려면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적당한 위기의식이 그룹에 퍼졌다. 윤종규 전 회장은 이렇듯 천우신조에 가까운 환경에서 회장 직에 오르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 윤 전 회장은 2002~2004년 통합 국민은행에서 부행장으로 일했다. 한국외환은행에서 행원으로 사회 첫 발을 내디뎠고 삼일회계법인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다. KB금융과 완전히 관계없는 인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KB금융 쪽에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도 없었다. 바로 이 점이 윤 전 회장의 최대 강점이었다. 

    윤 전 회장은 연줄에 의한 인사를 막겠단 취지 아래 지배구조 개선에 나섰다. 해외 선진국처럼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강화했다. CEO를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에서 빼버렸다. 

    경영권 승계 프로그램도 착실히 다져나갔다. 2016년부터 차기 후보군을 일찌감치 마련해 상시 관리 및 평가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시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예측불가능성을 최대한 낮추려는 의도에서다. 자연스레 사외이사들이 회사나 CEO 눈치를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실 이는 대단한 게 아니다. 선진국에선 상식으로 자리매김한 시스템이다. 다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대단했다. 지연, 혈연, 학연을 강조하고 "우리가 남이가"[사투리 버전임]라는 구호로 폭탄주를 들이붓는 한국에서 이 같은 시도는 해프닝에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윤 전 회장이 떠난 KB금융의 현주소는 어떨까. 누군가는 그동안의 노력이 빛바래질 거라고 지레짐작 설레발을 친다. 사외이사의 독립성 강화를 위해선 담대한 용기와 강인한 끈기가 필요하다. 반면 그걸 망치려 한다면 사상누각(沙上樓閣)처럼 손가락만 갖다대면 그뿐이다. 한국 여건에서 '시스템과 사람의 충돌'은 대부분 사람의 승리로 귀결돼 왔다. 이는 명확한 과제를 던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람의 욕심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시스템의 확립이라는 점이다. 

    #살다 보면, 개인 시간의 밀도가 짙어지는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를 둘러싼 것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로 작용한다. 비현실적이라 여길 만치,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픈, 도망치고 싶은 시간의 터널에 갇히곤 한다. 그럴 때면 과거, 현재, 미래가 뒤엉키며 혼란에 빠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다. 의식이 옅어지고 현실감이 떨어지면서 멀티버스(Multiverse·다중우주)의 세계가 열린다. 

    어쩌면 임종룡 회장도 이런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이 의도했던 것들은 저 멀리 비껴가고 한사코 내치려 했던 것들에 내몰리는 악몽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시간을 돌린다면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최초 보고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구악(舊惡)은 끊어야지"하고 선언했다면. 

    ps. 혼란스러워하는 에블리(양자경)에게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이 말한다. "인생의 사소한 결정들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지. 갈래길들이 생기고, 이 갈래길들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평행 우주가 되는 거지" 흔히들 멀티버스 상황을 멀티버스 화법으로 맞대응하려 한다. 비난은 잠시일 뿐, 시간과 함께 기억은 흐릿해질 거라 믿으며. 하지만 누군가에겐 철퇴가 내려지기도 한다. 아주 잠깐 스쳐가는, 사소한 선택, 그것으로 말이다. 임종룡, 그의 멀티버스 여행은 지금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