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서 기술 뚝심 역사 창조AI 시대… 메모리 경쟁력 시험대초격차 되찾기 총력… "포기란 없다"
  • ▲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삼성전자
    ▲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삼성전자
    50년 반도체 사업에서 유례없는 위기를 맞은 삼성전자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새해를 연다. AI(인공지능)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가운데 지난 50년 간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이룬 메모리 기술 경쟁력 초격차를 되찾고 파운드리 등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새 역사를 만들기 위한 원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 1993년 '신경영 선언'하는 이건희 선대회장 ⓒ삼성
    ▲ 1993년 '신경영 선언'하는 이건희 선대회장 ⓒ삼성
    ◇ 도전에 도전 거듭해 이룬 韓 반도체 역사… 그 중심엔 '삼성 정신'

    삼성은 지난해 12월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지 50주년을 맞았다.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시작된 삼성의 반도체 역사는 고(故) 이병철 창업회장의 든든한 지원으로 오늘날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는 삼성 반도체의 뼈대가 됐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은 선대회장의 최대 유산인 동시에 한국 경제사에 다시 보기 어려운 최고의 선구안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이 선대회장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할 당시 주변의 만류와 회의적인 시각에도 반도체 사업이 기술로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기술보국'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아본 덕이다.

    이후 불모지였던 한국 땅에서 독자적인 기술 개발로 첨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한 3번째 국가로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 것까지도 삼성이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1983년 11월 64Kb D램 개발에 처음 성공하고, 1992년 세계 최초 64Mb D램 개발로 세계 D램 시장 1위에 오를 때까지 이 선대회장과 이 창업회장의 뚝심은 오늘날 첨단 반도체 강국을 만든 근간이 됐다.

    삼성은 공학 인재들이 반도체 역사를 새로 쓰는데 함께 할 수 있는 문화를 처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이미 미국에 법인을 설립하고 현지 인재들을 모으기 위해 공을 들였고, 미국의 우수한 연구 환경을 뒤로하고 자국 반도체 산업을 키워보자는 큰 뜻에 동참한 한국인 연구자들이 하나 둘씩 삼성으로 모였다.

    기술과 함께 인재우선주의는 삼성이 지금까지도 지켜오는 창업 정신 중 하나다. 과거 삼성을 앞서가던 일본 반도체 기업인 도시바, NEC와 함께 미국 마이크론과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등을 제치고 D램 시장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비결도 우수한 인재를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연구개발(R&D)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삼성의 정공법 덕분으로 평가된다.

    1993년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로 올라선 이후 30년 넘게 지금까지 줄곧 1위 지위를 지켜온 것도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인재 육성의 성과로 볼 수 있다. 1위라는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이후에도 ▲1994년 256Mb D램 세계 최초 개발 ▲2002년 낸드플래시메모리 세계 1위 ▲2011년 세계 최초 20나노급 D램 양산 ▲2013년 세계 최초 3차원 수직구조 1세대 V낸드 양산 ▲2016년 세계 최초 10나노급 D램 양산 등 업계가 놀랄만한 기술 진보를 주도해왔다.

    실적 측면으로도 성장가도를 달렸다. 지난 1975년 2억 원으로 시작했던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매출은 지난해 사상 처음 100조 원 달성을 예고했다. 지난 1991년 처음 매출 1조 원을 달성한지 불과 30여 년만에 100배 성장이 이뤄진 셈이다. 영업이익도 지난 메모리 호황인 2022년 24조 원을 달성했는데, 이는 1983년 이 창업회장의 도쿄선언 당시와 비교해 7000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 ▲ 1984년 삼성전자 64Kb D램 첫 해외 출하식 ⓒ삼성
    ▲ 1984년 삼성전자 64Kb D램 첫 해외 출하식 ⓒ삼성
    ◇ AI로 패러다임 대전환… 실기로 위기 맞은 삼성

    이처럼 지난 50년 단단한 기반으로 써내려온 삼성 반도체 역사가 최근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30년 넘게 메모리 반도체업계에선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겨지던 삼성이 AI 반도체 시장에 선제적으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고, 뒤서던 경쟁사들이 앞다퉈 삼성의 자리를 넘보면서 삼성의 위기는 현실화됐다.

    삼성은 그동안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기회를 만들어 성장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사이클이 반복되는 메모리 시장 특성 상 사업에 오르막도 있었지만 내리막 시기에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와 양산으로 경쟁사를 제압했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과 낙오가 난무하는 시장 속에서 삼성 반도체는 생존력을 키워왔다.

    하지만 최근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지난 메모리 다운사이클이 끝나고 다시 반등 시점이 찾아온 지난해, 삼성은 예년의 호황기와는 다른 성과로 업계와 시장의 우려를 샀다.

    그러다 지난해 3분기에는 '어닝쇼크' 수준의 실적으로 반도체 수장을 맡은 전영현 부회장이 이례적으로 실적 부진에 대한 사과문까지 발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과문에서 삼성은 현 상황이 스스로도 인정하는 '위기'임을 분명히 했다.
  • ▲ 지난 2023년 차세대 반도체 R&D단지 건설현장에 방문한 이재용 회장 ⓒ삼성
    ▲ 지난 2023년 차세대 반도체 R&D단지 건설현장에 방문한 이재용 회장 ⓒ삼성
    삼성이 이 같은 반성문을 내놓기 전부터 업계에선 AI가 반도체 시장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끄는 동력으로 등장했지만 삼성이 여기서 뒤늦은 진입으로 고전하고 있다는 평을 내놓기 시작했다. AI 시대 핵심 메모리인 HBM(고대역폭메모리) 개발 시점이 경쟁사 대비 늦어지면서 좀처럼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메모리에 이은 핵심 사업으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 수백 조 원을 투입해 업계 선두주자인 대만 TSMC 따라잡기에 나섰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미세공정 기술력은 물론이고 고객사를 확보하는 영업력에 대규모 설비투자까지 선행돼야 하는 파운드리업계에서 후발주자로 뛰기란 생각보다 녹록지 않는 환경이다.

    설상가상으로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중국업체들이 빠르게 몸집을 키워 시장 잠식을 노리고 있다는 점도 삼성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범용 메모리는 그동안 삼성이 50년 역사를 통해 안정적으로 수익을 도모하는 핵심 시장이었는데, 지난해 중국 창신메모리(CXMT)가 시장에 공급량을 늘려 가격을 파괴하면서 실적에도 영향을 줄 정도가 됐다.
  • ▲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설비 반입식에서 인사말 전하는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 ⓒ삼성
    ▲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설비 반입식에서 인사말 전하는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 ⓒ삼성
    ◇ 불확실성 큰 사업환경에 위기감 크지만… 올해 체질개선 원년으로

    삼성이 어느 한 해 편안하게 사업을 이어갔던 적은 없지만 올해는 유례없는 반도체 사업 위기 속에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대외적으론 미국 트럼프 정부 2기가 출범하면서 불확실성에 불확실성이 더해진 살얼음판이 예상된다.

    이에 삼성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반도체 기술 초격차를 되찾는 첫 걸음을 다시 내딛기로 했다. 과거 삼성 반도체가 신화를 만들어냈던 경험을 공유하고 구성원들에게 동기부여할 수 있는 올드보이 경영진들이 다시 조타수 자리에 앉았다.

    삼성 반도체의 변화를 이끌 대표적인 인물은 전영현 DS부문장 겸 메모리사업부장이다. 전 부회장이 부문장에 사업부장까지 겸하는 대표이사 직할제를 도입해 현 위기상황의 근본 원인으로 꼽히는 메모리 반도체 초격차 회복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파운드리 사업은 이 회장이 "포기란 없다"를 외친 대표적인 사업이라는 점에서 올해 사업성을 회복하는 중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위해 북미 고객사 접점이 많은 한진만 사장이 사업부장을 맡고 기술통인 남석우 사장이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아 투톱체제로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체질 개선을 위한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점은 딜레마로 꼽힌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빅테크들의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데다, 관세를 앞세운 트럼프 2기 정부의 압박도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영원히 앞서갈 것 같던 엔비디아도 중국의 딥시크 쇼크에 휘청일 정도로 1년 후도 장담하기 어려운 기술력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시장은 기술 경쟁력에 뒤쳐진 기업을 마냥 기다려줄 이유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