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소각 대신 매각 택했다가 EB 발행 중단 선언애경산업 인수… 자사주 관련 법개정 앞두고 성급히 행동불성실공시법인 지정 예고… 당국·여론 반발에 한발 물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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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광산업이 자사주 전량을 교환사채(EB)로 활용해 애경산업 인수를 추진하려던 시도가 불과 일주일 만에 사실상 무산됐다.EB 발행을 통해 신사업 자금을 마련하고 계열 사모펀드를 통해 애경산업을 인수하겠다는 계획이었으나 주주 반발과 금융감독원 정정 요구, 여론의 비판에 직면하면서 발행 중단을 선언한 것. 정부가 추진 중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의 입법 속도가 빨라지자 시간에 쫓긴 태광산업이 오판했다는 지적도 나온다.4일 한국거래소는 태광산업에 대해 불성실공시법인 지정을 예고했다. EB 발행을 공시했다가 철회하는 과정에서 시장에 혼란을 야기한 데다, 매각 대상자를 최초 공시에서 비공개 처리했다가 금융감독원의 제재를 받고 뒤늦게 한국투자증권임을 공개한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문제는 EB 기초자산으로 내놓은 자사주의 규모다. 태광산업이 발행하려던 EB는 자사주 27만1769주를 담보로 하며, 이는 전체 발행주식의 24.41%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실제 태광이 자사주의 EB 전환을 공시하자, 주가는 큰 폭으로 흔들렸다. 또 대규모 EB 발행을 추진하면서도 매각 상대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점은 시장 신뢰를 훼손했다는 평가다.한국투자증권 역시 당시 투자 결정을 최종 확정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향후 법원이 트러스톤자산운용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더라도 실제 투자가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제기된다.트러스톤 측은 "태광산업이 애경산업을 직접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산하 사모펀드(PE)에 자금을 지원해 우회적으로 인수하려는 구조인데, 정당한 거래로 보기 어렵다"며 "자사주를 주당 순자산가치의 4분의 1 수준에 헐값 처분한 것은 배임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소액주주연대 등 일부 시민단체들도 "자사주 소각을 피하기 위한 EB 발행은 대기업 중 태광이 유일하다"며 "정부 정책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이에 대해 태광산업은 "트러스톤 측의 가처분 신청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후속 절차를 중단하기로 했다"며 "소액주주 및 노동조합 등 이해관계자들과 긴밀히 소통하고 입장을 존중하겠다"고 물러섰다.이러한 EB 발행은 이재명 정부가 추진 중인 상법 개정 방향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정부·여당은 자사주 장기 보유를 통한 지배력 유지 관행을 차단하기 위해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며, 지난 3일 상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데 이어 자사주 소각 관련 법안 논의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이에 따라 태광산업이 법 시행 전에 자사주를 활용해 투자 재원을 확보하려 한 시도가 ‘꼼수’라는 비판을 불러왔다.태광산업의 유동자산은 총 2조7692억원에 달한다. 기존 현금성 자산 1조9445억원에 지난 5월 SK브로드밴드 지분 매각으로 8038억원이 현금으로 유입된 결과다. 이를 모두 합치면 현금성 자산만 3조원에 육박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광이 EB 발행을 추진한 배경에는 자사주 활용 시점이 제한된다는 내부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이에 대해 태광 측은 "보유 현금이 많더라도 실제로 투자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유동성은 1조원 미만"이라며 "신규 사업 진출을 위한 종합적 재무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해명했다.태광은 EB 발행 목적을 '뷰타 관련 신사업 투자'라고 밝혔지만, 시장에서는 해당 자금 약 2000억원이 사실상 애경산업 인수대금으로 활용될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현재 애경산업의 시가총액은 약 4300억원(1일 종가 1만6300원 기준)이며, 애경그룹이 보유한 63.38% 지분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반영하면 매각가는 6000억~7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시장에서는 태광산업이 2000억원 정도의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애경산업 인수를 포기하진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업계 관계자는 "태광이 사실상 무차입 경영 기조를 유지해온 만큼 부채 부담이 적고,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수단은 충분할 것"이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