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배법 개정안 진격하는 국토부에 삭발로 맞서는 한의협 잠잠했던 의사 사회, 외려 한의사 반격으로 맞서심사체계는 이미 작동 중인데 '또 하나의 규제'가 해법일까해법은 자정 작용과 제도의 정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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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한의사협회
국토교통부가 최근 입법예고한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자배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안이 뜨거운 감자다. 핵심은 이렇다. 경상환자가 8주 이상 치료를 받을 경우 치료경과 자료를 보험사에 제출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그 타당성을 자동차손해배상보장위원회가 심의하고 그 업무를 자동차손해배상진흥원(자배원)에 위탁하도록 했다. 즉, 민간 보험사와 의료기관 간 장기치료 분쟁을 공적 기구에서 중립적으로 검토하게 하겠다는 취지다.표면적으로는 자동차보험 재정 건전성을 위한 제도개선이지만 실상은 의료인의 진료권, 환자의 치료 선택권, 보험사의 심사권이 충돌하는 구조다. 단순한 행정 개정이 아니라 의료-보험-정책이 맞물린 첨예한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문제는 이번 개정안에서 보험사 자체로 심사 권한이 넘어갈 수 있는 단서가 삽입되면서 거센 반발이 본격화됐다는 점이다.◆ 한의사의 반발, 규제가 아닌 생존의 위협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 건 한의사들이다. 대한한의사협회는 이 개정안을 "보험사의 셀프 심사 체계"로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서울시한의사회와 강원도한의사회장은 삭발을 감행했다. '한의대 폐지 운동', '면허 반납 투쟁'까지 언급되면서 투쟁 수위는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8주 제한이 단순한 치료기간 조정이 아니라, 한방 치료의 존립 기반을 흔드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강하게 깔려 있다. 실제로 고액 향후치료비가 집중되는 환자군 중 상당수가 한방의료기관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조항이 특정 집단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의심도 제기된다.한의사들의 반발은 정당한 측면도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다. 일부 한방병원이 '향후치료비'를 염두에 둔 장기 진단과 불필요한 입원, 반복적 진단서 발급으로 사회적 신뢰를 깎아먹은 건 부정할 수 없다. 자정 노력 없는 외침은 설득력을 잃는다.정부의 개입 명분도 여기서 비롯됐다. 나이롱 환자, 일부 의료기관의 도덕적 해이, 그리고 이를 둘러싼 보험 재정의 악화. 명분은 충분하다. 그러나 규제의 방식이 비효율적이거나 일방적일 경우 또 다른 불신만 낳는다. 그리고 정작 이러한 문제들을 조용히 해결해왔던 제도는 따로 있었다.◆ 그러나 심사는 이미 작동 중국토부는 '보험료 인하'와 '진료 남용 억제'를 명분으로 들고 있지만 실제 자동차보험 진료비에 대한 심사는 이미 2013년부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위탁받아 수행 중이다. 심평원은 단순히 서류 심사에 그치지 않고 현지 확인 등을 통해서 과잉진료나 장기입원 등 다양한 부정수급 사례를 적극적으로 걸러내고 있다. 특히 2022년 하반기부터는 경상환자에 대한 불필요한 장기입원 심사가 대폭 강화됐다.사전 중재와 청구오류 점검 서비스도 운영되면서 사후 조정 중심의 틀에서 사전예방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이동 중이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의심환자 패턴 감지와 특정 의료기관 집중 경향까지 모두 체계화돼 있다.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의 '8주 제한 규제'를 도입하고 그것도 보험사에 심사 권한을 일정 부분 넘긴다는 것은 행정 효율보다 오히려 퇴행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환자의 통증과 진료의 정당성은 숫자나 진단 주수로 환원될 수 없다.치료는 수치화할 수 없는 경험과 판단의 영역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곧 말로 규정하거나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본질이 의료에 깃들어 있다는 점을 행정은 잊지 말아야 한다.◆ 잠잠했던 의사 사회, 외려 한의사 반격으로 갈등 고조전공의, 의대생 복귀 이슈로 잠잠했던 의료계가 예상과 달리 한의협을 비판하고 나섰다.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는 한의계의 과잉진료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반박 입장을 냈다. 특히 '한의사 죽이기'라는 표현 자체를 비판하며 "진짜 죽어가고 있는 건 국민의 신뢰"라고 정면 대응했다.의협은 나이롱 환자 양산 현실을 지적하며 "자극적인 집단행동이 아니라 자정과 개혁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토부 개정안과 관련 한의사들과 선 긋기 노선을 취한 것이다. 추후 실손보험과 비급여 과잉 이슈에서도 의사 사회가 스스로 자정을 논하며 동일한 목소리를 낼지는 의문이다.종주단체 차원서 입장을 달리 했지만 의료계 일각에서는 해당 개정안이 한방병원뿐 아니라 의과 진료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으며 '과잉진료 프레임'이 의료계 전체에 덧씌워질 수 있다는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실제 심평원이라는 건강보험 심사기관을 둔 상황에서 보험사가 치료 지속 여부를 판단하게 되는 구조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배원의 위상, 심판자 될 수 있을까자동차손해배상진흥원(자배원)의 역할도 시험대에 올랐다. 자배원은 최근 들어 피해자 지원사업, 통계 관리, 분쟁 조정 등에서 전문성을 높이며 기존의 공제조합 관리 기능을 넘어선 역할을 꾀하고 있다. 특히 이번 자배법 개정안에서 상해등급 12~14등급 경상환자의 장기치료 타당성을 자배원이 위탁 심사하도록 명시하면서 자배원의 실질적 위상은 더욱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그 위상이 진정 '심판'으로 기능할 수 있느냐는 데 있다.현행 구조상 자배원은 국토부의 집행 창구에 가깝다. 의료적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심사조정기관으로 신뢰받기 위해서는 체질 개선이 불가피하다. 심평원과의 역할 중복을 최소화하면서도 의료 전문가 중심의 심사 체계를 정립하고 분쟁 조정에서 실질적 공정성과 균형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처럼 정부·보험사와의 구조적 거리감이 모호한 상태에선 제도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공청회와 설명회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책 설계의 디테일, 심사 기준의 정교함, 그리고 집행기관의 중립성까지 삼박자가 모두 갖춰져야 비로소 제도는 작동한다. 자배원이 진정한 조정자와 심판이 되기 위해선 단순한 위탁기관이 아니라 제도 신뢰의 최종 관문이 돼야 한다.◆ 정밀함과 자율이 해법이다이번 자배법 개정 논란은 단순한 행정조치가 아니라 의료인의 진료권과 환자의 치료 선택권, 보험사의 비용 통제권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복합적 갈등의 축소판이다. 의료·보험·행정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해결책은 단순한 규제 강행이 아니라, 이질적 요소들을 조율하는 정교한 설계와 균형의 미학이어야 한다.나이롱 환자는 분명히 존재하고 일부 의료기관의 과잉진료나 도덕적 해이도 개선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겠다며 무딘 규제라는 도구를 휘두르면 정상적으로 치료받고 있는 환자까지 상처 입는다. 불필요한 치료를 막기 위해 마련된 기준이 오히려 진짜 고통받는 환자의 치료 기회를 제한하게 된다면 그 규제는 목적을 상실한 채 수단만 남은 셈이다.더욱이 지금은 심평원의 심사체계가 이미 존재하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심사기구나 절차를 도입한다는 것은 행정 효율성을 저해하고 중복 규제의 혼란만 키울 수 있다.규제는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키가 아니다. 정책은 늘 현실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작동 여부를 검증하며 진화해야 한다. 특히 의료와 같이 사람의 고통을 다루는 영역에서 제도 설계의 정밀함은 생략할 수 없는 필수 조건이다.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원한다면 행정은 '규제 강화'라는 단순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료현장을 신뢰하고 자율적 개혁을 유도하며 필요한 경우에만 정밀한 개입을 시행하는 방식이 더 나은 해법이 될 수 있다.지금 필요한 것은 통제나 처벌이 아니라 신뢰와 자율 사이의 균형이다. 정교함 없는 개입은 진료현장의 혼란만 낳고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전가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