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수요 폭증에 "테스트 라인 포화상태"HBM4·2나노 샘플 검증 수조 원대 수주 판가름CS 과정 6~9개월 … 검증 병목 경쟁 새 변수로"설계보다 검증" … AI 시대 반도체 승부처 변화
  • ▲ SK하이닉스 HBM4 12단 제품 이미지 ⓒSK하이닉스
    ▲ SK하이닉스 HBM4 12단 제품 이미지 ⓒSK하이닉스
    AI(인공지능)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제조사들이 수조 원대 공급 계약의 성패를 좌우할 '샘플 경쟁'에 뛰어들었다. 글로벌 고객들의 검증 요청이 몰리며 테스트 라인은 풀가동 상태에 들어갔고 샘플 통과 여부가 반도체 수주 경쟁의 결정적 관문이 되고 있다.

    13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최근 AI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테스트 라인 가동률이 한계치에 근접한 상태다. 전 세계 AI 반도체 고객들의 테스트 일정이 겹치면서 검증 인력과 장비가 포화 상태에 이른 것으로 전해졌다.

    양사의 테스트 라인은 본격 양산에 앞서 고객용 샘플을 제작하고 품질을 검증하는 전용 생산 라인이다. 공정 안정성이나 수율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사전 양산 체계로 대량 생산 라인과는 별도로 운영된다.

    우선 SK하이닉스는 최근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그래픽처리장치) '루빈(Rubin)'용 HBM4 샘플을 우선 공급해 품질 검증을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 역시 오픈AI와 AMD, 마이크로소프트 등 복수의 글로벌 고객사에 HBM4 샘플을 제공하며 맞불을 놨다. 두 회사 모두 내년 상반기 본계약 체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6세대 HBM인 HBM4에 들어서면서 커스터머 샘플(Customer Sample, 이하 CS) 과정은 더 까다롭고 복잡해졌다. 기존 제품보다 적층 수와 대역폭이 크게 늘어나 공정 난도가 급격히 높아진 까닭이다. 엔비디아와 AMD, 테슬라 등 주요 AI 반도체 수요 기업들은 공급사 선정 전 단계에서 미세 공정 안정성, 발열 제어, 수율 등 세부 항목을 정밀 평가한다.

    업계 관계자는 "HBM4는 초기 샘플 단계에서 밀리면 최소 1~2년은 주력 물량 확보가 어렵다"며 "지금은 샘플이 곧 수주"라고 말했다.

    샘플 경쟁은 메모리뿐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로도 확산되고 있다. 삼성 파운드리는 2나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을 적용해 퀄컴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스냅드래곤8 5세대'용 샘플을 공급했고 퀄컴은 소비전력과 수율, 패키징 호환성 등을 중심으로 검증을 진행 중이다. 과거 스냅드래곤 8 3세대 물량이 TSMC로 넘어갔던 전례를 고려하면 이번 테스트 결과가 삼성의 2나노 공정 수주 여부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 ▲ 삼성HBM3E 12단 제품 이미지 ⓒ삼성전자
    ▲ 삼성HBM3E 12단 제품 이미지 ⓒ삼성전자
    반도체 수주 과정에서 커스터머 샘플(CS)은 단순한 기술 시연이 아니라 본계약의 전제 조건이다. 일반적으로 CS 공급 이후 ▲고객 품질검증(Qual Test) ▲피드백 반영 ▲재샘플(ES) ▲내부 인증(Internal Qual) 단계를 거쳐 최종 계약(Sign-off)에 이른다. 이 과정은 통상 6~9개월이 소요되며 불합격 시 재작업으로 수억 원대 비용이 발생한다.

    최근엔 AI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고객 맞춤형 샘플이 늘어나 테스트 라인 병목이 심화되고 있다. 글로벌 고객사들이 한 제품군에 대해 2~3곳의 제조사에 샘플을 요청하고 이를 동시에 평가하는 구조라, 제조사들의 테스트 라인이 동시다발적으로 병목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누가 먼저 얼마나 안정적으로 검증을 통과하느냐가 수주 경쟁의 승패를 가른다.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 오픈AI, 테슬라 등이 연말까지 차세대 칩 검증을 마칠 예정이라 주요 업체들이 테스트 일정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며 "지금은 일단 고객 라인에 먼저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반도체업계에선 이번 '샘플 전쟁'이 AI 반도체 시장의 경쟁 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신호라고 본다. 과거에는 생산능력이나 가격 경쟁력이 주요 판단 기준이었지만 이제는 검증 속도와 신뢰 확보 능력이 제조사의 실적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으로 부상했다. HBM4와 2나노 GAA, CoWoS(Chip-on-Wafer-on-Substrate) 패키징 등 차세대 공정이 잇달아 대기 중인 만큼 샘플 테스트에서의 결과가 향후 시장 점유율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AI 반도체 시장의 경쟁은 더 이상 생산라인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이미 반도체 시장에선 'AI 시대의 반도체 승부는 설계가 아니라 검증 라인에서 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고 샘플 하나가 수천억 원 규모의 계약을 결정짓는 시대가 됐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