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증설 속 전략 재조정 가능성국내 생산 중심 전략 시험대 올라복잡해진 경쟁구도 투자결단 변수로
  • ▲ SK하이닉스 청주 M15X 팹ⓒSK하이닉스
    ▲ SK하이닉스 청주 M15X 팹ⓒSK하이닉스
    미국 정부가 그간 유예해왔던 반도체 관세 카드를 다시 꺼내 들면서 SK하이닉스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관세 부과를 대미 투자와 연동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방침이 구체화되는 가운데 대만은 대규모 현지 투자 조건으로 사실상 반도체 관세 면제를 확정한 반면 한국은 아직 협상 테이블에 남아 있어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은 최근 특정 반도체 및 파생 제품에 대해 1단계로 25% 관세를 부과하고, 향후 더 광범위한 2단계 조치를 예고했다.

    정부는 현재 조치가 엔비디아·AMD의 첨단 시스템 반도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력으로 수출하는 메모리 반도체는 제외돼 있어 직접적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2단계 조치의 범위와 방식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만큼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관세를 단순한 통상 수단이 아닌 대미 투자 압박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최근 "반도체 기업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서 생산하는 것"이라고 언급하며 압박 수위를 끌어올렸다. 업계에서는 실제 100% 관세 부과 가능성은 낮다고 보면서도 이를 명분으로 한 추가 투자 요구가 현실화될 가능성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만은 이미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길을 정했다. 미국은 대만 기업과 정부로부터 대규모 대미 투자와 금융 지원을 약속받는 대신, 현지 생산시설 건설 및 완공 여부에 따라 일정 물량까지 관세를 면제하는 방식에 합의했다.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 TSMC가 애리조나 공장 증설을 포함해 미국 내 생산능력을 대폭 확대하기로 하면서, 대만은 사실상 '투자 연계형 무관세' 지위를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 정부 역시 지난해 한미 무역 협상에서 반도체에 대해 '불리하지 않은 대우', 즉 최혜국 대우 원칙을 명시했지만 대만의 선제적 합의로 협상 환경은 한층 까다로워졌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현재 추진 중인 미국 내 파운드리·패키징 공장이 향후 관세 협상에서 어느 범위까지 '대미 투자'로 인정받을지가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 ▲ SK하이닉스 HBM3E 12단 이미지ⓒSK하이닉스
    ▲ SK하이닉스 HBM3E 12단 이미지ⓒSK하이닉스
    이 가운데 SK하이닉스의 셈법은 특히 복잡해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인공지능(AI) 메모리 수요 급증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생산능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첫 공장 가동 시점을 3개월 앞당겼고, 청주 M15X는 HBM 양산을 앞두고 있다. 여기에 19조원을 투입해 첨단 패키징 팹 P&T7을 청주에 새로 짓기로 결정하며 HBM 중심의 국내 공급망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공격적인 증설은 HBM4 시대를 겨냥한 전략적 판단이다. 증권가에서는 SK하이닉스가 올해 100조~130조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생산능력 확보가 실적의 지속성을 좌우할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미국이 관세와 투자 혜택을 연계할 경우 국내 중심의 생산 전략이 중장기적으로 부담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동시에 제기된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SK하이닉스의 캐파 증설 전략 역시 단순한 확대가 아닌 속도·지역·방식의 정교한 조율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AI 메모리 수요 급증에 대응해 청주 M15X 조기 가동, P&T7 신규 투자, 용인 클러스터 구축 등 중장기 증설 계획은 이미 가동 궤도에 올려놓았지만 미국이 관세를 대미 투자와 연계하는 기조를 분명히 하면서 추가적인 해외 캐파 확대에는 부담이 커졌다는 평가다.
  • ▲ 반도체 생산 시설 내부ⓒSK하이닉스
    ▲ 반도체 생산 시설 내부ⓒSK하이닉스
    특히 관세 부과 여부와 투자 인정 기준에 따라 원가 구조와 수익성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만큼 무리한 증설보다는 HBM 중심의 선택적 캐파 확장과 기존 라인의 효율 극대화에 무게를 두는 전략적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당분간 '어디에, 얼마나 짓느냐'보다 '어떤 캐파가 가장 높은 수익을 내느냐'를 기준으로 증설 판단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미국 내 경쟁 구도 역시 변수다. 미국 마이크론은 기존 공장 인수와 현지 생산 확대를 통해 AI 메모리 생산능력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만약 미국이 메모리 반도체까지 관세 압박을 확대할 경우 미국 내 생산 기반을 갖춘 기업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SK하이닉스가 국내 증설과 대미 투자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을 다시 계산해야 하는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러한 통상 환경 변화가 한국 반도체 산업 전반의 투자 판단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은 최근 방송 인터뷰에서 대만의 TSMC 사례를 언급하며 "성장할수록 불리해지는 제도와 환경이 기업의 투자 결정을 위축시키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관세, 규제, 형사 리스크까지 겹친 상황에서 글로벌 경쟁 속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의식이다.

    업계 관계자는 "HBM은 지금도 수요가 공급을 앞서는 시장이어서 생산능력 확보가 곧 경쟁력"이라며 "미국 관세 정책이 단기간에 결론 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SK하이닉스는 국내 증설과 미국과의 협상 전략을 동시에 가져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