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한은·국민연금·복지부 4자 환율 대책 협의체 가동1322조원 국민연금, 전략적 환헤지·스와프 연장 카드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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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한은행
원·달러 환율이 1500원 턱밑까지 치솟자 정부가 마침내 국민연금까지 ‘환율 안정 실탄’으로 활용하는 논의를 공식화했다. 고환율을 방치해온 당국의 늑장 대응이 손실로 이어질 경우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도 불투명하다는 비판이 나온다.2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5원 오른 1477.1원에 마감했다. 지난 4월 9일(1484.1원) 이후 7개월 반 만의 최고치다. 지난주부터 1400원대 중후반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던 환율이 1500원선에 근접하자, 기획재정부·한국은행·국민연금공단·보건복지부는 이날 첫 비공개 회의를 열고 환율 안정 대책을 집중 점검했다.이번 회의는 외환당국과 연기금, 소관 부처가 모두 참여한 사실상의 ‘환율 대책 협의체’ 출범 회의다. 그동안 각 기관별로 흩어져 이뤄지던 대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요 수급 주체를 한 자리에 모아 구조적인 해법을 모색하겠다는 의미다. 정부는 이날 킥오프 회의를 시작으로 필요 시 수시 회의를 열어 시장 상황과 대응 수위를 조정한다는 방침이다.당국이 서둘러 공조에 나선 배경에는 고환율의 상시화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 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이상 수준에서 장기간 유지된 것은 과거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미국발 고금리·레고랜드 사태, 비상계엄기처럼 대형 충격이 겹쳤던 시기 후에나 나타났던 현상이다.원화의 실질가치도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올해 10월 말 기준 한국의 실질실효환율(REER·2020년=100)은 89.09로, 2009년 8월(88.88) 이후 16년 2개월 만에 가장 낮다. 명목환율과 실질환율이 동시에 과도한 원화 약세를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외국인 자금 이탈도 환율에 불을 붙이고 있다. 이달 들어 외국인 투자자는 코스피에서 12조원 넘게 순매도한 것으로 파악된다. 외국인의 매도 확대는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는 수요를 키우고, 개인투자자까지 위험 회피에 나서면서 수급 불균형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당국의 구두개입만으로는 시장 심리를 되돌리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돼 있다”고 전했다.이날 회의의 최대 관심사는 국민연금을 활용한 환율 안정화 방안이었다. 8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운용자산은 1322조원으로, 이 가운데 43.9%인 약 581조원이 해외 자산이다. 대규모 해외투자 과정에서 원화를 달러로 환전하는 수요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국민연금이 환율 상승 요인 중 하나로 지목돼 왔다.정부 안팎에서는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를 강화하는 시나리오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전략적 환헤지는 환율이 미리 정해 놓은 수준을 넘어서면, 보유 중인 달러 표시 해외자산의 일부(최대 10%)를 자동으로 헤지하는 방식이다. 국민연금이 달러 선물환을 매도하면 이를 은행이 매입하고, 은행은 다시 현물시장에서 달러를 내다 팔아 포지션을 맞춘다. 이 과정에서 시장에 달러 공급이 늘어나면서 환율을 누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한국은행과 국민연금 간 외환스와프 계약 연장 여부도 논의 테이블에 올라 있다. 국민연금은 해외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통상 시장에서 달러를 매입하지만, 외환보유액을 보유한 한은과 스와프를 통해 직거래하면 그만큼 시장 내 달러 수요를 줄일 수 있다. 현재 한은과 국민연금은 650억달러 한도로 외환스와프 계약을 맺고 있으며, 계약 만료 시점은 올해 말이다.다만 국민연금을 사실상 ‘환율 방파제’로 활용하는 방안에는 만만치 않은 부담도 따른다. 해외투자 비중 축소나 과도한 환헤지 확대는 장기 수익률을 떨어뜨려 국민 노후자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국민연금과 한은 간 스와프 거래를 통한 달러 공급이 과도해질 경우, 미국 재무부가 과거 문제 삼았던 ‘환율조작’ 논란이 재점화될 수 있다는 점도 부담 요인이다.연금 업계 안팎에서는 “수익성 중심의 기금운용 원칙은 지키되, 환율 급변 등 거시환경이 기금과 시장 안정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반면 “환율 안정을 이유로 국민연금에 과도한 역할을 요구할 경우 기금운용의 독립성과 중립성에 대한 논란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계론이 동시에 제기된다.단기적인 정책 수단에 대한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단기적으로는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과 함께 은행 선물환 포지션 규제,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조정 등을 병행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 한국은행과 국민연금 간 외환스와프 연장, 은행 선물환 포지션 한도 완화, 외화대출 용도 규제 완화 등이 조합될 수 있다”면서도 “이런 조치들은 환율 상승 속도와 상단을 누르는 역할은 가능하지만, 근본적인 수급 구조를 뒤집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평가했다.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국민연금이라는 ‘소방수’를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지에 대해 시장 안정과 장기 수익률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함께 만족시키는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