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는 곳’에서 ‘만드는 곳’으로 … 유통의 역할 재정의가격 경쟁 끝 … 상품·채널·데이터 통제 싸움기술 아닌 전략의 문제, 산업 구조가 바뀌어
  • ▲ 제조와 유통의 만남ⓒChatGPT 생성
    ▲ 제조와 유통의 만남ⓒChatGPT 생성
    고물가·고금리 장기화로 원가 부담이 커지고 가격 인상 여력은 막히면서, 유통업계가 구조 전환의 벼랑 끝에 서고 있다. 완성된 상품을 납품받아 파는 기존 방식만으로는 수익성과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편의점과 백화점 등 주요 유통 채널들이 제조 영역과 판매 채널의 경계를 허무는 선택에 나섰다. 파는 곳과 만드는 곳의 구분이 흐려지는 지금, 유통의 문법 자체가 다시 쓰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유통업계 구조전환 흐름은 글로벌 연구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는 ‘Omnichannel Retailing: A Review and Research Agenda’ 연구를 통해 "온라인·오프라인·D2C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유통의 역할이 단순한 판매 채널을 넘어 상품 기획과 채널 운영을 통합 관리하는 ‘운영자’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MIT 슬론 매니지먼트 리뷰 역시 ‘The Future of Omnichannel Retail’ 보고서에서 채널 경계 붕괴를 '기술 혁신의 결과'라기보다 '조직과 전략 차원의 선택' 문제로 진단했다.

    이같은 구조 전환의 배경에는 고물가·고금리 기조 속에서 악화된 원가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2025년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약 2.1%로 한국은행의 목표(2.0%)를 소폭 웃도는 수준을 유지했으며, 12월 소비자물가는 전년동월 대비 약 2.3% 상승했다. 일부 식료품·외식 물가는 3%대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생활물가 상승 압력이 존재한다.

    원재료비와 인건비, 물류비 부담이 동시에 높아지면서 가격 인상 여력은 제한된 반면, 단순 할인이나 마진 경쟁만으로는 수익성을 방어하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이에 기업들은 가격을 깎는 대신 상품 기획과 채널, 고객 접점까지 직접 통제하는 방향으로 전략의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 ▲ 리테일 테크기업 컬리의 가정간편식(HMR) 자체 브랜드(PB) ‘차려낸’이 출시 9개월 만에 판매량 100만 개를 돌파했다.ⓒ컬리
    ▲ 리테일 테크기업 컬리의 가정간편식(HMR) 자체 브랜드(PB) ‘차려낸’이 출시 9개월 만에 판매량 100만 개를 돌파했다.ⓒ컬리
    유통업계의 행보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편의점과 백화점은 자체 브랜드(PB) 확대와 직소싱·직수입, 즉석 제조 강화 등을 통해 단순 판매 채널을 넘어 제조 영역으로까지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맥킨지 글로벌 인스티튜트는 ‘The Next Normal in Retail’ 보고서를 통해 리테일 기업의 PB와 직접 제조, 소싱 확대는 마진 개선 목적이 아니라 상품과 가격, 공급망에 대한 통제력 확보를 위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데이터도 이를 뒷받침한다. 닐슨IQ의 ‘Private Label Growth Report’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에서 PB 상품 비중은 경기 침체기마다 구조적으로 상승하는 흐름을 반복해왔다. 국내 역시 유사한 양상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발표한 ‘2025년 식품외식산업 주요 통계’를 보면, 2023년 기준 식품 제조업 대기업의 매출 증가율은 둔화되거나 역성장을 기록한 반면, 중소 식품기업은 상대적으로 플러스 성장세를 유지했다. 기존 제조 구조만으로는 안정적인 성장을 담보하기 어려워졌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이 같은 환경 변화는 제조사들의 전략 전환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OECD는 ‘Changing Business Models in Retail and Manufacturing’ 보고서에서 유통사의 제조 진출과 제조사의 D2C 확산을 글로벌 공통 구조 변화로 규정했다. 

    식품·소비재 기업들이 멀티 브랜드·멀티 채널 전략과 자사몰 리뉴얼에 속도를 내는 것도, 유통과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가격과 고객 데이터를 직접 관리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유통의 변화가 기술 혁신의 결과라기보다 구조적 경쟁의 심화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는 “유통업체의 제조 영역 진입은 마진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상품과 기준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정연승 단국대 교수 역시 “채널과 업의 경계 붕괴는 누가 상품과 소비자를 지배하느냐를 둘러싼 경쟁이 본격화된 결과”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