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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없는 경제발전이 가능했을까?
-[‘으랏찻자 박정희’ (4)] 유신 40년을 유신하라!조우석 /문화 평론가, 뉴데일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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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없는 성장이 가능했을까요?
적어도 1960년대엔 그랬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1950년대 말부터 미국의 후진국 원조정책이 바뀌죠. 조건 없이 무상으로 주던 것을 개발 프로젝트를 구체적으로 요구합니다. 국내도 1950년대 후반부터 개발계획이 필요하다는 공론이 형성됐고, 박정희도 이런 시대적 의제를 읽었습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주임)“시대 흐름이 그랬고, 계획이 있다고 경제발전이 그냥 되는 겁니까?
쉽게 말해 좋은 대학 가려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명문대를 갑니까?
2공화국 장면 정부가 역대 정부 최초로 경제제일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그렇다고 그 허약한 정권 아래서 성장이 가능했을까요?
대부분 학자가 무리한 가정 아래 박정희 정부를 폄하하지만, 바로 그런 게 제가 말하는 대표적인 프로그레시브 콤플렉스의 반영이죠. ”
-문화평론가 조우석최근 박태균 교수와 대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유신 40돌을 계기로 공론을 형성해보자는 취지였다.
<한겨레21>이 주최한 자리는 내게 유익했는데, 대화 상대인 박 교수가 그만큼 진지했다.박정희 없이도 성장이 가능했다는 전망의 증거로 그는 테크노크라트의 성장을 특히 주목했다. 그들은 1950년대부터 성장하고 있었다. 50년대 말 이후 상층부로 진입한다. 송인상, 차균희, 정재설처럼 정부 지원으로 국제기구 경험을 쌓고 온 관료들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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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심장했던 서울대 박태균 교수와의 ‘유신 토론’
즉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았더라도, 전체적인 틀에서 한국경제는 성장했을 것이라는 게 박교수의 낙관적 분석이었다.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경제발전의 속도와 성장률, 방식에선 약간의 차이가 있었겠지만, 대세는 성장쪽이라는 진단이다.
그런 관측에는 반(反)박정희, 반 5·16, 그리고 반 유신정서가 배어있다. 그래서 문제인데, 박 교수에겐 허약했던 장면 정부의 기본적 상황도 문제가 안 됐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장면 정부는 오래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내각제라서 어느 시점에 내각이 바뀌었을 것이고, 국민들이 필요를 느꼈으면 더 강한 지도자를 뽑았을 것이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나는 1960,70년대 개발연대의 기적이란 당시 한국과 박정희에 허용된 거의 일회적 사건이라는 걸 강조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굴레에서 벗어난 제3세계 나라 중에서 경제개발에 성공한 케이스가 없거나 드물다. 그래서 나는 종종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을 ‘역사의 로또’를 맞은 케이스라고 표현한다. 그 말이 좀 거슬리고,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면, 1960년 10월에 발간된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의 유명한 한국 상황 묘사를 다시 들어보시라.“한국의 실업자는 디글디글하다. 노동인구의 25%이며, 1960년 현재 국민소득은 100불 이하이고, 전력 산출량은 멕시코의 6분의 1이다, 수출은 200만 달러, 수입은 2억 달러. 당연히 가까운 장래에 한국의 경제기적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나라에 대한 미국 원조도 실망스럽다. 생활수준 향상을 가져오기 어렵기 때문인데, 차라리 경제성장은 북한이 순조롭다.”
20세기 한반도 드라마의 핵심- 박정희의 5·16과 유신
실은 <포린 어페어즈>의 이어지는 예측 하나가 우리 가슴을 더욱 철렁하게 만든다.
“결국 한국인들의 선택은 워싱턴이나 모스크바가 아니라 서울이냐 평양이냐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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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교수를 포함한 많은 프로그레시브(진보) 및 리버럴 지식인들의 분석과 달리, 지난 반세기 한반도 현대사는 어찌보면 아주 간단하게 설명된다.승승장구하는 걸로 보이던 평양이 끝내 역사에서 미끄러졌다. 대신 국내외 모두의 분석대로 장래성이 전혀 없는 서울이 벌떡 일어섰다.
20세기 중후반 가장 드라마틱한 대형 드라마의 핵심에는 박정희가 지휘한 5·16과 유신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누가 이걸 외면할까? 이걸 부정하면 할수록 거대한 허위의식이 자리 잡을 뿐이다.
필자가 칼럼 제목을 ‘으랏찻차 박정희’라고 한 것은 괜한 신파가 아니며, 우리의 오랜 통념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문제는 반 박정희 통념은 실로 견고하고, 학문과 양심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포장돼 있다는 점이다.대표적인 사례가 ‘경제민주화 논의의 원조’쯤이자,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길러낸 학자이자, 지금은 학계 원로로 예우 받는 모 학자의 경우이다.
그는 옛날 인물이 아니다. 지난 주 우리는 신문 지면에서 대쪽 선비이자 완고한 느낌을 주는 그의 얼굴을 다시 봤다. 현재 80대 중반인 그를 위해 제자들이 전9권짜리 전집을 출간해줬는데, 핵심 내용은 의외로 심플하다. 즉 그의 학문세계란 프로그레시브-리버럴 콤플렉스와 반 박정희 정서를 뭉뚱그려진 것인데, 그게 거대한 학문적 허구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나는 재확인했다. 일테면 한 신문은 그가 “효율보다 형평, 성장보다 분배’를 표방하며 시장만능주의 주류경제학을 비판해 온 대표적 원로 경제학자”라고 거창하게 소개했다. -
“경제발전은 ‘평등과 분배의 정의’ ‘균형적 발전’ ‘자립경제’라는 가치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그의 소신은, 오늘날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경제민주화’로 이어졌다”는 것인데, 그 지적에 무릎을 쳤다.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언제 적의 낡은 소리를 학문의 이름 아래 유포하는가 싶었다.아니나 다를까 그는 박정희를 정면에서 비판한다. “한국 경제 성장 과정에서 경제개발계획이라는 틀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박정희 정부식의 고지점령 식,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제개발계획은 균형발전과 민주주의 등 다른 중요한 가치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노학자의 이름을 밝히진 않는 게 예의이겠지만, 그는 1955년 서울대 상대에 부임한 뒤 1980년대에 정치경제학과 종속이론 국내 소개 등을 선도해 왔던 인물이다. 4·19 혁명 당시 교수단 데모에 서울대 상대 교수로는 유일하게 참여했던 경력이 있는데 그를 말할 때는 이것이 무슨 훈장인양 통용된다. 그 원로 교수는 여전히 40~60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중진 중견 교수 등이 모두 우러러보는 위치인데, 그의 경제학은 왜 필자의 눈에는 거대한 학문적 위선에 불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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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원로 경제학자의 학문적 소신과 위선 사이
‘평등과 분배의 정의’, ‘균형적 발전’, ‘자립경제’라는 그의 단골 용어는 별 게 아니다.
그 뒷면에는 마르크스주의적 체제변혁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은 아는 이는 대충 아는 비밀이다.실제로 그 노 교수보다 좀 더 솔직했던 경제학자 그룹은 민족경제 어쩌구하며 한국사회를 신(新)신민지로 규정했다. 그게 1980년대 중후반 우리 학계의 화두인양 등장했었음을 우리는 모두 기억한다. 당시 거의 모든 젊은이들은 그 말에 취해 소모적 토론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 경제학자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의 지적대로 “객관적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관념이자 허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당시 사회구성체 논쟁이란 “1930년대 일본과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논쟁의 복사판”(안병직-이영훈 지음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66쪽)이다. 그래서 신기루처럼 잊혀졌고, 거품처럼 꺼졌다. 그게 지난 20여 년의 과정이다.
하지만 아주 죽진 않았다. 죽기는커녕 그게 2012년 현재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대권주자 세 명이 입을 모아 합창하는 ‘경제민주화’ 구호로 발전했다. 이쯤되면 조금 전 언급한 80대 원로 경제학자의 학문적 노망은 한국사회 전체를 괴롭히는 정치적 망령(亡靈)으로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얘기가 잠시 곁가지로 새지만, 경제민주화는 별 게 아니다. 돌이켜보면 건국 이후 40년은 산업화의 과정이었다. 민주화 바람이 거셌던 1987년 체제 이후 지금까지 사반세기 동안은 경제민주화의 시기로 분류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저성장과 노사갈등 그리고 소모적 사회분쟁은 모두 경제민주화의 부작용이다.그렇다면, 2012년 지금은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처럼 경제민주화를 합창할 게 아니라, 경제민주화의 폐해를 언급해야 할 때이다. 그게 순서이다. 내 생각만은 아니다. 그게 최근 새 책 <대통령의 경제학>을 펴낸 언론인 이장규의 시각임을 기회에 귀뜸해드린다.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자. 박태균 교수와의 대담에서 그는 박정희 군사정부 등장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지적했다. 박근혜가 감당해야할 정치적 굴레도 비용이지만, 더 큰 것은 유신과 군사독재로 인해 학업에 몰두해야 할 젊은이들이 반유신, 반독재 투쟁에 뛰어들면서 치러야 했던 희생과 기회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최근 과거사 문제로 겪는 남남갈등 역시 또다른 사회적 비용이다. -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이러했다.
“아직도 ‘박정희 반대로!’만을 외치는 수준에 머무는 지식사회 자체가 소모적이고, 기회비용을 증폭시킨다는 생각은 왜 안 하고 있으신가?”
내 판단으로 대한민국 학계는 역사를 너무 정태적·구조적으로 본다. 내 눈에 그들은 꼭 무균실의 역사실험장에서 일하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 같은 느낌을 준다. 섣부른 지식과 정보가 나열된 학부 교과서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일반적인 사회발전 경로와 방식을 전제한 뒤 우린 왜 그렇게 못했느냐고 몰아세우고 질타한다.
그래선 곤란하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가히 ‘신비’에 속한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게 미스터리이다.
모든 역대 대통령들은 다 불행했다. 망명하고, 총 맞아 죽고, 감옥 가고, 자식 감옥 보내고, 스스로 목숨 끊고….
그럼에도 사회는 이만큼 성장했다. 이 불일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나는 거시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성공했다고 본다. 역대 대통령들은 한국경제라는 기적의 탑에 돌을 하나씩 얹었다. 학자들처럼 어떤 이념형적 경로를 머릿속에 넣고 보면 한국경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불행했던 역대 대통령의 시대를 어떻게 종식시킬까?
다만 프로그레시브 지식인들의 지적처럼 유신체제라는 게 민주주의의 최소 기제마저 없애버린 것은 사실이다. 단 그 상황을 지나치게 정태적으로 보면 전체 모습을 읽을 수 없다. 역사는 동태적으로 봐야 한다. 때론 최고지도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고….
안 그러면 무기력한 사후진단 밖에 안 나온다. 자기들이 무임승차해 통과해온 역사에 대해, 뒤에서 돌 던지는 게 과연 정당한가. 내가 5·16을, 그리고 유신을 옹호하는 건, 그 누구도 결단의 배후에 놓인 지도자의 고뇌를 이해하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반복하지만, 그건 거대한 허위의식이다. 유신 40년을 맞는 올해 그걸 되새기는 계기였으면 한다.
그리고 올해 대선이 소모적 캠페인이 안 되려면 누군가 적극적 논의를 개진해야 한다.‘으랏찻차 박정희’는 다음 회부터는 5·16 그리고 유신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짓고, 박정희라는 ‘문제적 인물’을 새롭게 들여다 보려한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현대사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