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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해운 산업의 구조조정이 임박한 가운데 정부와 한국은행이 지원 방안을 놓고 의견 조율을 하지 못한채 엇박자를 내고 있다.
정부는 한국은행이 산업은행채권을 인수하거나 한국은행이 직접 대출하는 방법, 즉 한국형 양적완화를 제안했지만 한국은행은 오히려 ‘손실 최소화’ 원칙을 내세우며 자본확충펀드 방식을 역제안한 것이다. -
8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와 한국은행의 시각차로 기업 구조조정 해결 방안이 답보상태에 있다.
◇한은 직접 대출은 NO, 담보 있어야 발권력 동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4일 ‘아세안+한·중·일’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나라 정부에 자본확충펀드를 제안했다.
자본확충펀드는 지난 2009년 운영된 바 있다. 당시 한국은행이 시중은행에 채권을 담보로 대출받고 은행들은 그 자금으로 펀드를 조성해 BIS비율이 낮은 은행에 다시 지원했다.
즉, 자금회수를 원칙으로 돈을 빌려준 것이다.
이주열 총재는 “기업 구조조정에 발권력을 이용하려면 납득할 만한 타당성이 필요하고 투입한 돈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게 기본 원칙”이라며 “한은법 상 확실한 담보가 있어야 발권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손실 최소화 원칙에서 보면 출자보다 대출이 부합한다”며 “출자 방식을 100% 배제하는 것은 아니고 타당성이 있으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양적완화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 총재는 또 “우리는 기본적으로 한국판 양적완화란 표현을 하지 않는다”며 “지금 기업 구조조정 논의 과정에서 적절한 표현은 국책은행 자본확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구조조정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하며 한은은 구조조정에 전문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자본확충펀드 대출조건은 1년 이내…구조조정 지원엔 부적합
2009년 운영된 자본확충펀드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시중은행을 지원하기 위해 긴급히 마련된 지원책 중 하나다.
주목할 점은 당시 대출 조건이 1년 이내 기간이라는 점이다. 한국은행법 제64조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하는 바에 따라 금융기관에 따라 여신업무를 취급할 수 있다.
단, 한국은행이 취급한 날로부터 1년 이내에 만기가 되는 증권으로 한정돼 있다. 증권 담보물 역시 신용증권, 정부가 보증한 유통증권, 한국은행의 채무를 표시한 유통증권,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한 증권 등으로 제한했다.
결국 한국은행이 국책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에 대해 1년 이내의 담보가 있는 기한부 대출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2009년 금융위기와 달리 현재 조선·해운 구조조정에 사용될 자금은 1년 이내 회수할 수 있을 지 미지수다. -
◇한은법 개정 없인 구조조정 불가, 결국 20대 국회서 해결해야
한국은행이 자본확충펀드 카드를 꺼낸 이유는 중앙은행으로써 중립성과 신뢰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기축통화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남용하다간 통화의 신뢰성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유럽이 마이너스 금리정책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기축통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한다고 해도 자금회수에 1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결국 조선·해운 구조조정 문제는 국회에서만 풀 수 있다.
정부 역시 한은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은행의 직접 대출방식과 한은법 개정 두 가지 방식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구조조정 방안이 나오고 자율협약이 어떻게 되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며 “구조조정을 하는데 당장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닌 만큼 사회적 합의와 함께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