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역본부 발표자료 경청해 검토하는 수준… 교수 등 민간전문가 들러리 전락유명무실 위원회에 유전자 분석 조작 우려도 제기
  • ▲ AI 유전자 분석 설명.ⓒ연합뉴스
    ▲ AI 유전자 분석 설명.ⓒ연합뉴스

    농림축산검역본부 조류인플루엔자(AI) 역학조사위원회의 무용론이 대두하고 있다. 현장 중심의 역학조사는 실종됐고, 검역본부의 발표를 경청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역학조사가 서면보고로 이뤄지다 보니 일각에서는 조작이나 왜곡 가능성마저 제기하는 실정이다.

    ◇검역본부는 올해도 철새 탓만

    27일 농림축산식품부 등에 따르면 올해 H5N6형 고병원성 AI가 전국으로 확산하며 이날 0시 기준으로 닭·오리 2730만 마리가 도살·매몰 처리됐거나 도살 처분될 예정이다.

    올해 국내에서 확인된 고병원성 바이러스 유형은 H5N6형과 H5N8형 등 2가지다.

    검역본부는 올해 유행하는 H5N6형은 2014년 중국 광동성과 홍콩에서 유행한 유형과 유사하다고 지난 13일 역학조사 중간결과를 발표했다. H5 유전자는 98.94~99.24%, N6 유전자는 99.06~99.13% 유사하다는 설명이다. 검역본부는 올해도 철새를 AI 주범으로 지목했다.

    H5N8형도 국내에 남아 있던 바이러스가 재발한 게 아니라는 판단이다. 2014~2015년 국내에서 유행했던 유형과 유전자 상동성이 4%포인트 이상 차이 난다는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검역본부는 H5N8형이 쇠오리에 의해 올해 새롭게 유입된 것으로 결론 내렸다.

    2가지 유형 모두 철새를 발병 원인으로 지목한 셈이다.

    문제는 방역당국이 역학조사 결과를 토대로 철새를 AI 전파의 주범으로 지목하면서 방역활동의 초점이 농가 간 수평전파보다 철새에 맞춰졌다는 점이다.

    농식품부 AI 역학조사위는 닭·오리 2021만 마리가 도살 처분된 지난 22일에야 철새에 의한 전파보다 허술한 방역망과 방역 현장의 안이한 인식 등 방역당국의 총체적인 관리 부실이 막대한 피해를 불렀다고 진단했다.

    지방자치단체는 효력이 없는 '맹탕' 소독제로 방역하고 오토바이 음식배달원이 소독절차 없이 도살 처분 현장을 들락거렸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지난달 16일 전남 해남과 충북 음성의 산란계(알 낳는 닭)와 오리 사육농가에서 AI 의심 신고가 접수된 지 37일째만이다.

    적잖은 학자들은 AI가 철새에 의해 유입됐지만, 농가 확산은 당국의 부실한 사후 관리가 한몫했다는 의견이다.

    일부 학자는 국내에 이미 들어와 남아 있던 바이러스가 재발했을 가능성마저 제기한다.

    H5N8형과 관련해 역학조사위원장인 김재홍 서울대학교 교수는 지난 22일 농식품부 백브리핑에서 검역본부 발표내용을 인용해 "지난 13일 경기 안성천의 분변시료에서 검출된 H5N8형은 철새에 의해 새로 유입된 것"이라며 "올해 유럽 등에서 검출된 바이러스와 유사하다"고 설명했었다.

    그러나 서상희 충남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는 "전 세계 과학자들은 독일 등 유럽에서 발생하는 H5N8형이 2014년 우리나라에서 재조합된 뒤 (철새에 의해) 전파됐다고 본다"며 "결국 같은 유형으로 분류되는 만큼 검역본부와 역학조사위 발표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유럽 등지에서 확인되는 H5N8형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바이러스와 유전적으로 밀접한 유사성을 보이는 만큼 국내 재발 가능성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기 안성천 분변시료를 수거한 곳은 올해 4월5일 마지막으로 H5N8형 AI가 확인됐던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의 오리 농가와 직선거리로 52㎞쯤 떨어져 있다.

    서 교수는 "H5N8형 바이러스가 (검역본부 설명대로) 철새가 아니라 국내에 이미 들어와 있었고, 재발한 거라면 방역의 방향이 달라져야 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유명무실 역학조사위

    일각에서는 역학조사위가 제구실을 못한다고 지적한다. 역학조사나 현장 검증 없이 검역본부의 발표내용을 서면으로 검토만 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역학조사위 AI 분과위원회 소속 A교수는 "현재 역학조사위는 공무원이 준비한 바이러스 유전자 자료를 보고 토의해 결론 내는 방식"이라며 "결론은 사실상 이미 내려져 있는 상태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위원회 이름은 역학조사위원회지만, 역학조사는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교수 등 민간전문가는 사실상 검역본부 공무원의 의견을 합리화해주는 들러리에 불과한 셈이다.

    A교수는 "전문가들로 소위원회를 만들어 직접 농장을 살펴보고 시료를 분석해 공무원이 한 것과 비교해야 이를 토대로 제대로 된 방역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며 "무조건 철새 탓만 해선 방역이 제대로 될 리 없다"고 주장했다.

    B교수도 "현재의 역학조사위는 유명무실하다"며 "경험 많은 전문가들이 현장을 살피고 AI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데 올해 단 한 번도 부른 적 없다"고 밝혔다.

    이어 "검역본부에서 철새 탓만 하기에 일부 교수가 현장에서 머리를 맞대고 AI 확산 원인을 찾자고 제안도 했지만, 부르지 않았다"며 "역학조사위 구성은 하나 마나이고 검역본부가 발표하는 내용을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A교수는 더 나아가 "바이러스 유전자 분석은 한 기관이 독점하면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마음만 먹으면 조작도 가능하다"고 우려했다.

    검역본부에서 민간 유전자분석회사에 시료를 보내면 염기서열 분석자료를 보내오는데, 이후 벡터 유전자 등을 제거해 정리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역학조사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일부 민간위원은 회의참석 요청이 와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C교수는 "그나마 검역본부가 가까운 경기 안양에서 경북 김천으로 옮겨갔고, 개인일정까지 겹치면 요청이 와도 잘 안 가게 된다"며 "아예 자료를 보내주고 서류검토로 회의를 대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