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가, 1분기 영업손실 2조5천억 전망글로벌 수요 위축 영향 실적 부진 장기화 우려업계, 정부 실질적 지원 및 현실적 제도 개선 등 요구 잇따라
  • ▲ 주유. ⓒ정상윤 기자
    ▲ 주유. ⓒ정상윤 기자

    국내 정유사들이 올해 1분기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제마진의 마이너스(-) 행진, 국제유가 급락에 따른 재고평가손실 등이 원인이다.

    12일(현지시각) 산유국들의 극적인 감산합의는 이뤄졌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 따른 수요 위축으로 당분간 실적 부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 정제마진, 유가, 수요가 모두 회복돼야 비로소 유의미한 실적 개선이 가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4사의 1분기 영업손실이 2조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가의 1분기 컨센서스는 SK이노베이션의 영업손실이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됐다. 다른 회사들 역시 최악의 실적이 예상된다. GS칼텍스 5700억원, 에쓰오일 6700억원, 현대오일뱅크 4700억원 등이다.

    지금까지 정유업계에서는 셰일가스 패권을 둘러싸고 산유국들간 '가격전쟁'이 있었던 2014년 4분기 실적이 최악이라고 평가해왔다. 당시 정유4사의 영업손실은 1조1500억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올해 1분기 영업손실을 당시 수치를 훨씬 웃도는 사상 최악일 것으로 점쳐진다. 2분기 역시 조 단위 적자를 이어가며 2014년 이후 6년 만에 연간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실적 악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정제마진의 하락이다. 정유사들의 수익성 지표인 정제마진은 지속적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이달 첫째 주 배럴당 -1.4달러로 집계됐다. 전주대비 배럴당 0.3달러 악화한 수치다. 싱가포르 정제마진은 주간 평균 기준 지난달 셋째 주 마이너스로 돌아선 이후 3주 연속 마이너스 마진을 유지하고 있다.

    정제마진은 휘발유·경유 등 석유제품가격에서 원유가격과 수송·운영비 등 비용을 뺀 금액이다. 통상 국내 정유업체의 정제마진 손익분기점은 4~5달러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를 밑돌면 정유사가 제품을 생산할수록 손해가 난다는 의미다.

    국제유가가 한 달 새 배럴당 50달러 선에서 20달러대까지 급락하면서 원유를 정제해서 생산한 석유제품가격이 원유 도입가격보다 더 낮은 최악의 상황까지 빚어졌다. 여기에 유가 급락으로 기존에 비싸게 사들인 원유가치가 떨어져 재고평가손실도 대규모로 떠안았다.

    더 큰 문제는 정제마진 악화와 산유국들의 유가 전쟁으로 인한 가격 폭락 등 악재와 코로나19까지 겹쳤다는 점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따라 글로벌 수요가 급감한 것이다.

    12일(현지시각)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주요 산유국 연대체인 OPEC+는 하루 970만배럴 감산에 합의했다. 970만배럴은 글로벌 산유량의 10% 안팎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번 감산의 실질적 영향이 없다고 보고 있다. 추가적인 유가 하락을 제한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수요절벽이나 정제마진 악화 상황을 반등시키기는 부족하다는 분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970만배럴의 감산 폭은 3000만배럴로 추정되는 수요 감소 폭에 비해 여전히 부족하고, 코로나19 영향으로 수요 자체가 워낙 위축돼 있어 감산합의로 유가 반등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원유 컨설팅업체 리스타드 에너지는 이달에만 원유수요가 하루 최대 2700만배럴 감축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는 석유산업 역사상 최대 수준의 감소 폭이다. 이 업체는 또 5월과 6월 원유수요가 각각 2000만배럴, 1500만배럴가량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S&P글로벌플래츠의 크리스 미젤리는 "하루 970만배럴의 감산은 당장 다음 달부터 하루 1500만~2000만배럴어치 위축되는 수요를 메우기에는 부족하다"며 "OPEC이 감산량을 더 늘리지 않는 이상 유가에 대한 지속 가능한 회복세를 기대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 ▲ SK 울산CLX. ⓒ성재용 기자
    ▲ SK 울산CLX. ⓒ성재용 기자

    특히 유가가 반등한다고 하더라도 코로나19 영향으로 수요 절벽이 심각한 만큼 실적 개선으로 이어질지 미지수다. 최근 유가 하락은 항공편 감축, 입국 금지, 외출금지령 등 수요 전망이 급감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대개 유가가 떨어지면 수요가 늘면서 정제마진 감소 효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코로나19가 수요 증가를 봉쇄하면서 유가 폭락의 단점만 얻게 된 상황이다. 이동 제한에 따른 영향이 완벽히 사라지거나 유가의 드라마틱한 급등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실적 부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황현수 신영증권 연구원은 "산유국들이 결정한 5월과 6월 감산 규모는 글로벌 원유 공급의 약 10%를 차지하는 수준"이라며 "코로나19 우려에 기인한 글로벌 원유수요 감소분이 더욱 크기 때문에 감산합의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글로벌 원유수요 추정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 점진적인 감산이행은 원유시장에 확산된 과잉공급 부담을 줄이기에는 미흡한 조치"라며 "당분간은 과잉공급 환경이 쉽게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게다가 코로나19 회복국면에 들어선 중국 정유사들이 공장가동률을 올리면서 아시아 지역 내 수급 개선도 한동안 힘들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의 경우 정부가 유가가 급락하더라도 자국 석유제품 판매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해주기 때문에 코로나19로 타격을 봤던 중국 정유사들의 수익성은 개선될 수 있다.

    상황이 이렇자 업계에서는 정부에 세제완화 등 각종 정책적 지원을 해달라고 건의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2분기분 석유 수입·판매 부과금 징수를 90일간 유예하기로 했다. 수요 부족으로 남는 석유를 저장할 공간으로 한국석유공사의 비축시설을 이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업계에서는 수요 부진 사태가 전 세계적으로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석유류 개별소비세 조건부 면세 △환경·안전시설 투자세액공제율 확대 △임시 투자세액제도 부활 등 추가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관세 및 부가가치세 감면, 단기 유동성 공급을 위한 금융지원 등 실질적인 지원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영상 어려움이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추가 지원책과 현실적인 제도 개선이 필수"라고 말했다.

    한편, 사상 초유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정유사들은 일제히 '비상경영' 모드에 돌입했다.

    국내 1위 사업자인 SK에너지는 이달부터 가동률을 기존 100%에서 10~15% 낮췄으며 추가 하향 조치도 검토 중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였던 2009년 이후 처음이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 8일부터 43일간 제2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정기보수를 실시할 예정이다. 현대오일뱅크 전체 생산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이 공장은 하루 36만배럴의 석유제품을 생산한다.

    GS칼텍스 여수공장도 올 하반기 예정됐던 정기보수 일정을 지난달 중순으로 앞당겨 실시 중이다. 이 공장은 전 세계 정유공장 가운데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4위 규모의 시설을 갖춘 GS칼텍스의 주력 사업장이다.

    구조조정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강달호 사장을 비롯해 전 임원의 급여 20%를 반납하고 경비예산을 70%까지 삭감했고, 에쓰오일은 1976년 창사 이후 처음으로 희망퇴직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