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C→정유사→오일머니' 헤게모니 이동 … "설 자리가 없다"설비폐쇄, 통폐합, 업종전환 등 과감한 결단 위한 마지막 골든타임 놓치지 말아야
  • ▲ 191127 사진=성재용 기자. ⓒ뉴데일리
    ▲ 191127 사진=성재용 기자. ⓒ뉴데일리
    국내 3대(여수, 울산, 대산) 석유화학단지가 깊은 불황의 늪에 빠졌다. 이번 불황은 단순 가동률 하락에 그치지 않는다. 롯데케미칼의 경우 생산할수록 손해가 커지다 보니 가동을 멈췄다.

    위기가 있을 때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다운스트림 스페셜티로 방향을 잡고 올인했어야 했지만, 단순 시장 상황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글로벌 기업인 바스프나 다우처럼 과감한 구조조정과 업체간 사업재편을 추진하지 못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시장판도 변화가 예견됐던 만큼 이번 위기는 더 뼈 아프다. 천수답(天水畓)식 경영의 한계가 쓰나미로 덮친 것이다.

    탈출구도 없어 보인다. LG화학이 그나마 최신 설비인 No.2 NCC를 중동 석유자본과 조인트벤처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공동 운영하는 방안을 물밑 작업 중이지만 구체적 움직임은 없다. 1조원대의 가격을 놓고 치열한 눈치싸움 중이다. 석유가 거의 나지 않는 비산유국의 설움이다.

    국내 NCC(Naphtha Cracking Center)업계의 위기는 국내 정유사들이 석유화학산업 고유 영역을 넘어 영토확장에 나서면서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정유사들은 산유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등유·경유 등 석유제품을 공급하고, 이 과정에서 병산되는 석유화학산업 기초 원료인 나프타(Naphtha)를 NCC업체에 팔아 왔다.

    나프타를 공급받아 운영되는 석유화학산업은 이를 크래킹해 △에틸렌(ETHYLENE) △프로필렌(PROPYLE) △부타디엔(BUTADIENE) △벤젠(BENZENE) △톨루엔(TOLUENE) △자일렌(XYLENE) 등 6대 기초유분을 뽑아낸다.

    이 기초유분은 인간의 생애주기,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라이프 사이클에 적용된다. 태어나자마자 입에 무는 젖병부터 죽기 전 병원에서 사용하는 수액 팩까지 석유화학제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1600여가지 제품으로 변형이 가능한 석유화학제품은 반도체산업은 물론, 전자, 자동차, 유통, 제약, 식품산업까지 연결된다.

    하지만 정유사들의 변심으로 수년 전부터 내다 팔지 않고 NCC를 확보해 자체 다운스트림 강화에 나섰다. NCC업계를 짓밟고 정제시설을 기반으로 한 종합석유회사로 잠시나마 생명 연장에 나선 것이다.

    원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NCC업체들은 나프타 수입 의존도가 더 높아졌고, 그만큼 비용 부담은 커졌다. 또 그동안 나름의 상생관계였던 정유업계와는 한순간 경쟁 관계로 변질했다.

    게다가 우리나라 석화제품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이 엄청난 시설 확충을 통해 물량을 쏟아내며 시장을 흔들면서 설자리를 잃었다. 특히 러시아와 이란의 석유 수출이 막히면서 중국은 국제석유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의 반값에 석유를 들여와 사실상 경쟁할 수 없는 가격에 물량을 쏟아낸다.

    전기차 등장으로 수송용 연료시장 위축에 따른 원유 수출량 감소를 걱정하는 중동 산유국들의 움직임은 더욱 거칠다. 기존 '정유→석유화학'으로 이어지는 기존 산업의 단계마저 파괴하며 게임의 법칙을 바꾸고 있다.

    에쓰-오일이 국내에서 추진하고 있는 샤힌프로젝트는 '정유사의 정제설비(CDU)와 석유화학사의 NCC'를 합쳐놓은 설비로, 원유에서 바로 에필렌, 프로필렌, 부타디엔을 쏟아 낸다.

    이 설비가 완공되는 2026년 말경이면, 에쓰-오일 샤힌프로젝트에서 밀어내는 에틸렌 가격은, 기존 NCC 업체에서 생산하는 가격의 '3분의 1' 수준이다.

    결국 기존 NCC업체들은 범용제품을 벗어나 부가가치가 높은 스페셜티나, 소량 다품종 신소재 및 정밀화학분야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실제 국내 석화기업에서 생산하는 태양광용 범용실리콘의 경우 '톤'당 기준으로 거래되지만, 스페셜티 기업들이 생산하는 의료용 실리콘의 경우 '그램' 기준으로 거래된다. 같은 실리콘 같지만 가격 차이는 수백, 수천배에 달한다.

    기업이 갈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중인데, 정부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업계 자율성에 기대며 뒷짐을 지고 있다. 왕과 백성이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비 오는 날을 기다리며 하늘만 바라보는 형국이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국내 수출시장을 견인하고, 기업의 캐시카우 역할을 담당해 왔던 석유화학산업의 초라한 모습이다.

    기업이 한번 놓친 타이밍의 후폭풍은 회복 불가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는 한계 기업들이 통폐합, 설비폐쇄, 업종전환 등 과감한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금 석유화학업계에 필요한 것은 심폐소생술을 위한 마지막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