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한 통화스와프 등 안정장치 없인 투자 리스크 상당美 '굴욕적' 요구 그대로 수용하면 정치적 타격도 불가피일본식 협상 요구하는 美 … 정부 "일본과 한국은 다르다"트럼프 임기 2029년, 美대법 판결도 앞둬 시간은 한국편
  • ▲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25.08.26. ⓒ뉴시스
    ▲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25.08.26. ⓒ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3500억달러(487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에 대해 전액 현금 인출을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를 사실상 거부한 것은 '버티기 전략'으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3500억달러는 우리나라 전체 외환 보유액의 84%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이 대통령이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특히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22일(한국시간) 한국의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와 관련 "(한미간)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3500억달러를 모두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 위기 당시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보도된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투자 처리 방식에 대한 이견 때문에 한미 간 무역 합의 내용을 문서화하지 못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미국간 관세 문제를 가능한 한 조속히 해결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합의를 파기할 의사가 있냐는 질문에는 "혈맹 관계인 두 나라 사이에서는 최소한의 합리성은 유지될 것이라 믿는다"고 답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3500억달라의 전액 현금 투자는 수용하기 어렵지만, 합리성을 전제로 협상 타결 가능성은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서 미국을 상대로 일종의 '버티기 전략'에 들어갔다는 시각도 있다.

    앞서 한미는 지난 7월 30일 한국이 3500억달러의 대미 투자를 집행하고 1000억달러 상당의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는 것을 조건으로 상호관세율을 25%에서 15%로 인하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의 최대 수출 품목인 자동차에 대한 품목 관세도 25%에서 15%로 내리기로 했다. 미국은 상호관세는 지난달부터 15%를 적용하고 있지만 자동차 관세는 여전히 25%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이 자동차 관세를 협상 지렛대로 삼아 3500억달러의 직접 투자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펀드의 대부분을 대출과 보증 형식으로 지원한다는 입장이다. 또 현금 투자 비율이 높아야 한다면 한미간 무제한 통화 스와프 체결이 불가피하다고 맞서고 있다. 이는 대규모 달러 유출로 원화 가치 폭락 등 외환시장 충격에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반면, 미국은 일본과 동일한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에 3500억달러를 넣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일본은 관세 협상 대가로 대미 투자금 5500억달러(약 765조원)를 트럼프 대통령이 결정하는 방식으로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투자처를 지정한 날로부터 45일내 일본이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기존보다 더 높은 '관세 폭탄'이 부과된다. 일본이 투자 원금을 회수하기 전 발생하는 수익은 양국이 50%씩 가져가지만 회수된 뒤에는 90%를 미국이 가져간다. 

    이는 한국으로선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이와 관련,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9일 한미 무역 협상 후속 협의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미국 측에) 일본과 한국은 다르다는 부분을 최대한 설명했다"고 밝혔다.

    실제 일본은 외환보유액이 1조3000억달러(약 1819조원)로 한국(4100억달러)의 세 배 이상이고,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체결돼 대미 투자 여건에서 한국보다 유리한 환경이다.

    미국이 굴욕적인 협상 조건을 고집하면서 국내에선 "차라리 관세를 물고 트럼프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버티는 게 더 이득"이라는 여론도 형성됐다. 트럼프의 임기는 오는 2029년 1월 종료된다. 재집권이 불가능한 트럼프 행정부에 487조원을 쏟아붓느니, 25%의 관세에 따른 손실을 감당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최근 5년간 대미 무역 흑자 규모는 2020년 166억달러, 2021년 227억달러, 2022년 280억달러, 2023년 444억달러, 2024년 557억달러로 총 1674억달러다. 최근 5년간 미국으로부터 거둔 무역 흑자를 전부 반납하더라도 미국이 요구하는 3500억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최근 미국 연방항소법원은 트럼프가 각 무역국에 부과한 상호관세를 무효로 판단했고, 대법원 최종 판단을 앞두고 있다. 대법원이 항소법원의 판단을 유지할 경우 트럼프가 부과한 관세 정책은 폐기 수순을 밟는다.

    아울러 미국 싱크탱크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선임경제학자 딘 베이커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과 일본이 약속한 대미 투자 방식과 관련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설명한 방식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다면 한·일이 합의를 수용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리석다"고 지적했다.

    베이커는 "미국이 15%로 낮춘 상호관세를 25%로 올리면 한국의 대미 수출은 국내총생산(GDP)의 0.7%인 125억달러(17조원) 감소할 수 있다"며 "왜 125억달러를 지키려고 3500억달러를 줘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요구한 3500억 달러의 20분의 1(175억 달러)을 피해 기업과 노동자를 지원하는 데 쓰는 게 더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이런 사정을 감안해 미국을 상대로 '버티기 전략'이 먹혀들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한미 관세 협상을 최종적으로 어떻게 타결짓느냐에 따라 이재명 정부의 성공 여부가 결정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