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K 모두 당했다 … 중국 D램 굴기 이면에 기술 유출피해 수십조에도 솜방망이 처벌 … 재발 막을 장치 부재'외국엔 간첩죄 적용 불가' 한계 … 개정 요구 확산
  • ▲ 반도체 클린룸 전경ⓒ삼성전자
    ▲ 반도체 클린룸 전경ⓒ삼성전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핵심 기술 유출 문제로 장기간 곤혹을 치르고 있다. 중국 반도체 기업으로의 인력 유출과 함께 국가핵심기술이 조직적으로 넘어간 사실이 수사로 확인됐지만 막대한 피해 규모에 비해 처벌 수위는 낮고 재발을 막을 제도적 대책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기술 유출이 실제로 중국 반도체 산업의 급성장을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닌 국가 경제·안보 차원의 위기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24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정보기술범죄수사부에 따르면 검찰은 최근 중국 반도체 기업으로 이직하면서 D램 반도체 핵심 공정 기술 등을 빼돌린 삼성전자 전직 임직원 10명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이 가운데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1·2기 개발팀에서 활동한 5명은 구속 기소됐다. 수사 결과 이들은 삼성전자가 수년간 대규모 투자를 통해 세계 최초로 확보한 10나노대 D램 공정 기술을 조직적으로 유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CXMT는 2016년 설립 직후부터 삼성전자의 핵심 인력을 집중적으로 영입하며 기술 확보에 나섰다. 삼성전자 핵심 연구원이 이직 직전 수백 단계에 달하는 공정 정보를 자필로 옮겨 적어 반출한 사실도 확인됐다. 해당 기술은 삼성전자가 약 5년에 걸쳐 1조6000억원을 투입해 개발한 국가핵심기술이다. 검찰은 중국 현지 직원 진술과 이메일 분석을 통해 CXMT가 보유한 자료와 삼성전자의 공정 자료 일치율이 98%를 넘는다는 점을 입증했다.

    CXMT의 기술 확보 과정은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진행됐다. 취업 제한 규정을 피하기 위해 위장 회사를 설립하고, 일정 기간 근무 후 중국 본사로 이동하는 방식이 활용됐다. 핵심 인력 영입 과정에서는 기존 연봉의 2~4배, 일부 고위급 인사에게는 수십억원대 보상이 제시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조직적인 기술 탈취를 통해 CXMT는 설립 초기의 기술 격차와 수율 문제를 극복했고, 2023년 중국 최초이자 세계 네 번째로 10나노대 D램 양산에 성공했다.

    문제는 기술 유출의 피해가 삼성전자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발 과정에서 CXMT는 협력업체를 통해 SK하이닉스의 D램 공정 관련 국가핵심기술까지 추가로 확보한 것으로 수사 결과 확인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핵심 기술을 동시에 확보한 CXMT는 글로벌 D램 시장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키웠고, 기술 자립을 내세운 중국 반도체 산업 성장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검찰은 이번 기술 유출로 인한 국가 경제 피해를 최소 수십조원 규모로 추산했다. 세계 시장 점유율 변화를 토대로 계산한 결과, 기술 유출로 인해 삼성전자의 매출 감소만 수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판단했다. D램 공정 기술이 넘어가지 않았다면 CXMT가 차지한 생산·수출 물량 상당 부분을 국내 기업이 확보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는 시장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산업기술보호법과 부정경쟁방지법상 최대 15년까지 징역형이 가능하지만 실제 재판에서는 징역형 집행유예나 비교적 짧은 실형에 그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기술 유출로 얻은 고액 연봉이나 보너스를 범죄 수익으로 환수하는 데에도 법적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피해 규모가 수십조원에 달해도 처벌과 환수는 제한적인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은 삼성과 SK하이닉스뿐 아니라 국내 반도체 산업 전반에 구조적 불안을 안기고 있다. 기술 유출이 실제 경쟁국의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활용됐음에도 이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서다.

    특히 현행 형법상 간첩죄 적용 대상이 북한으로만 한정돼 있어 중국 등 외국 기업으로 국가핵심기술이 넘어가더라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한계가 반복적으로 지적돼 왔다.
  • ▲ SK하이닉스 HBM3E 12단 이미지ⓒSK하이닉스
    ▲ SK하이닉스 HBM3E 12단 이미지ⓒSK하이닉스
    이에 국회에서는 간첩법 개정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여야는 간첩죄 처벌 대상을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논의해 왔으며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국가 전략기술 유출을 국가안보 범죄로 다뤄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하고 있다. 최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장비 핵심 기술을 외국에 넘긴 사건에서 전원 집행유예가 선고된 점이 알려지면서 처벌 강화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개정안의 핵심은 외국의 지령이나 사주에 따라 국가기밀과 국가핵심기술을 탐지·수집·유출하는 행위를 간첩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그동안 산업기술보호법으로만 다뤄지던 기술 유출 범죄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엄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자는 취지다. 기술 유출이 단순한 기업 손실을 넘어 국가 경쟁력과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인식이 반영됐다.

    기술 유출 범죄가 최근 수년간 급증하고 있다는 점도 간첩법 개정 논의에 힘을 싣고 있다. 국가핵심기술과 산업기술의 해외 유출 건수와 피해 추산액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반도체를 비롯한 전략 산업이 주요 표적이 되고 있다. 수사와 처벌 체계가 현행 수준에 머무를 경우 기술을 빼돌려도 ‘해볼 만한 범죄’라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삼성과 SK가 겪고 있는 반도체 기술 유출 사태는 개별 기업의 관리 문제를 넘어 제도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로 평가된다. 핵심 기술이 해외로 넘어간 뒤에야 수사가 이뤄지고,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처벌은 제한적인 구조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간첩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못한 채 지연될수록 기술 유출을 노리는 산업 스파이들에게 시간과 기회만 제공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기술이 곧 국가 경쟁력인 시대에 기술 유출에 대한 대응 역시 기업 차원을 넘어 국가 시스템으로 격상돼야 한다"며 "간첩법 개정을 통해 같은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국회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