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7년까지 700조 투입 …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 구상시스템반도체·소부장 키운다 … M&A 점치는 두산·한화미·중·일 보조금 전쟁 … 치솟는 투자비·인프라 부담
  • ▲ 반도체 생산 현장ⓒ삼성전자
    ▲ 반도체 생산 현장ⓒ삼성전자
    미국·중국·일본·유럽이 막대한 보조금을 앞세워 AI 반도체 주도권 경쟁에 나선 가운데 한국 정부가 2047년까지 700조원 이상을 투입하는 초대형 반도체 육성 전략을 내놨다. 메모리 초격차 유지와 함께 시스템반도체·소부장 생태계 확장을 통해 '세계 반도체 2강' 도약을 목표로 한 이번 전략을 기점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물론 두산·한화까지 반도체 패권 경쟁에 합류하며 산업 전반의 지형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AI 반도체 경쟁이 국가 간 총력전 양상으로 번지는 가운데 한국도 본격적인 장기전에 돌입했다.

    정부는 10일 'AI 시대 반도체 산업 전략'을 발표하고 2047년까지 국내 반도체 공장과 연구 인프라 조성에 약 700조원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전력·용수 공급을 위해 국비 지원을 확대하고 반도체특별법에 각종 특례를 신설해 인허가와 인프라 구축을 뒷받침하겠다는 구상도 함께 제시했다.

    이번 전략의 핵심은 메모리 분야에서의 '초격차'를 유지하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시스템반도체와 팹리스 산업을 대폭 키우는 데 있다. 정부는 현재 21기에 불과한 반도체 생산·연구 팹을 37기까지 늘려 세계 최대·최고 수준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통해 글로벌 AI 반도체 수요 증가 국면에서 생산 능력과 기술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판단이다.

    AI 시대를 겨냥한 기술 투자도 구체화됐다. 정부는 미래형 반도체로 꼽히는 NPU(신경망 처리 장치) 개발과 상용화에 2030년까지 1조2676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퓨리오사AI 리벨리온 딥엑스 등이 NPU 개발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 첨단 패키징 기술 확보를 위해 3606억원을 지원하고 차세대 메모리와 미래차·로봇 핵심 부품으로 활용되는 화합물 반도체 개발에도 각각 2159억원 2601억원을 배정했다.
  • ▲ SK하이닉스 이천 사업장 전경ⓒSK하이닉스
    ▲ SK하이닉스 이천 사업장 전경ⓒSK하이닉스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강화를 위한 '상생 파운드리' 구축 계획도 포함됐다. 정부는 삼성전자 SK키파운드리 DB하이텍과 협의해 4조5000억원 규모의 12인치 40나노급 파운드리를 조성하고 국내 팹리스 기업들이 시제품 제작과 상용화에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이를 통해 설계 역량은 있으나 생산 인프라 부족으로 성장에 제약을 받아온 국내 팹리스 기업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겠다는 구상이다.

    동시에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산업 구조를 완화하기 위해 비수도권 중심의 산업 재편에도 나선다. 광주를 첨단 패키징 산업단지로 부산을 전략반도체 소부장 특화단지로 경북 구미를 반도체 소재·부품 기업 집적지로 육성하는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 구상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이 같은 전략에 대해 반도체 업계는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AI 패권 경쟁이 국가 간 총력전으로 전개되는 상황에서 국가 차원의 종합 대응 전략이 제시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기술·생산 리더십 확보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강화 소부장 역량 확대 인재 양성이 한국 반도체 경쟁력을 구조적으로 높일 기반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이미 계획된 투자와 산업단지 조성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점도 함께 강조했다.

    이 같은 정책 환경 변화는 대기업들의 전략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던 반도체 산업 구도에 두산과 한화 같은 그룹들이 적극적으로 가세하면서 경쟁 구도가 한층 입체화되는 모습이다.

    두산그룹은 반도체를 3대 핵심 사업 축 중 하나로 삼고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두산은 세계 3위 실리콘 웨이퍼 제조사인 SK실트론 인수에 본격 나섰다. 인수가 마무리될 경우 SK실트론은 두산의 반도체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핵심 전략 자산으로 자리 잡게 된다.
  • ▲ 삼성전자의 36GB 12단 HBM3Eⓒ삼성전자
    ▲ 삼성전자의 36GB 12단 HBM3Eⓒ삼성전자
    AI 시장 확대로 웨이퍼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생산능력 확대와 설비 투자 여력이 커질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SK실트론은 이미 구미 공장 증설과 미국 베이시티 공장 투자를 통해 실리콘 및 실리콘카바이드(SiC) 웨이퍼 생산 확대 계획을 밝힌 바 있다.

    한화그룹 역시 반도체 소부장 분야를 중심으로 인수합병(M&A) 가능성을 점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비전을 축으로 반도체 장비와 설계 역량을 강화해 그룹 차원의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한화세미텍은 HBM 생산에 필수적인 열압착(TC) 본더 장비 시장에 진출했으며 경쟁력 강화를 위해 외부 기술과 자산을 흡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정부 정책과 대기업 전략이 맞물리며 한국 반도체 산업은 새로운 성장 국면에 진입하고 있지만 글로벌 경쟁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칩스법'을 통해 총 390억달러 규모의 보조금과 세액 공제를 제공하고 있으며 중국은 대규모 국가 반도체 펀드를 통해 수십조원 단위의 자금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고 있다. 일본과 유럽연합(EU) 역시 현금 보조금을 앞세워 글로벌 반도체 기업 유치에 나서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반도체 팹 건설 비용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투자 재원에 대한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청주 M15X 팹은 20조원에 달하는 투자비가 투입됐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개별 팹 역시 수십조원 규모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삼성전자 역시 평택과 용인에서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장비 가격과 건설비 상승이 동시에 반영되면서 과거 예상보다 전체 투자 규모가 크게 불어난 상황이다.

    세액 공제 중심의 지원 방식 역시 한계로 지적된다. 반도체 산업은 경기 변동에 따라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될 수 있는데 적자 국면에서는 세액 공제가 실질적인 인센티브로 작동하기 어렵다. 미국처럼 적자 상황에서도 현금 환급이 가능한 제도와 비교하면 국내 지원 체계는 여전히 보완이 필요하다는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700조원 투자라는 큰 그림을 제시한 것은 분명 의미가 있지만 글로벌 경쟁은 이미 보조금과 인프라를 앞세운 '속도전'으로 전개되고 있다"며 "대기업과 신생 팹리스 소부장이 함께 뛰기 위해서는 인허가와 전력·용수 같은 기본 인프라부터 경쟁국 수준으로 맞추는 현실적인 지원이 병행돼야 K반도체 전략이 현장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