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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좌파는 기득권세력이 보낸 스파이
서울대 조국 교수의 강남좌파 옹호론을 비판한다
변희재(빅뉴스대표)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 “사람의 의식은 존재 기반이나 배경과는 다르게 발전한다. 강남에 사니까 보수적이려니 하는 것은 기계론적 접근이다. 나는 오히려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강남 좌파, 영남 좌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본인 스스로 강남에 살고 서울대를 나오고 미국 유학을 마친 강남좌파로서의 자기 변명에 가까운 발언이다.
전북대 신방과의 강준만 교수는 2006년 5월 월간인물과 사상에서 ‘강남좌파’에 대해 분석한 바 있다. 강 교수는 먼저 ‘강남 좌파’의 긍정론에 대해 △상류층의 진보적 가치 역설의 효과 △갈등의 양극화 방지 △상류층에 속하면서도 하류계급을 위한다는 위로 의식 등을 꼽았다.
반대로 부정론에 대해서는 △권력․금력․상징자본과 도덕적 우월감까지 가지는 부당성 △진보를 이용한 더 많은 금력과 권력의 축적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진보 프로그램 등을 들었다. 강 교수는 ‘강남좌파’의 이 같은 일장일단을 열거하면서 “무조건 ‘강남 좌파’를 탓할 수많은 없다”며 “평가를 내리며 공정한 대응을 하는데 문제인 것은 오히려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특수성”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한국사회는 ‘정치혐오’를 넘어 ‘정치저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치를 비롯한 공적 영역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높다”며 “이런 상황에서는 ‘강남 좌파’의 이론적 정당성이 인정받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강준만, “강남좌파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
이어 “배부른 진보가 일부러 배고픈 척 할 필요는 없지만 공적 영역을 향해서만 진보를 외쳐댈 게 아니라 자신의 사적 영역과 행태도 진보적 가치의 지배를 받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공적 영역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해소되는 날까진 과도기적 처방 차원에서라도 ‘강남 좌파’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강남 좌파’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의 구도를 넘어서 기존 엘리트 행태를 옹호하는 것을 그만 둬야 한다”며 “이제는 엘리트-비엘리트의 구도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엘리트는 공복(公僕-국민에 대한 봉사자)이다”면서 “좌파 담론이 귀족 신분 유지에 어떻게 이용되며 무슨 성과를 내고 있는가를 검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교수가 ‘강남좌파’에 대해 긍정론과 부정론 모두를 다루었지만, “강남좌파의 한계를 깨야 한다”고 주장한 점을 고려해보면, 강교수의 시각은 전체적으로 부정적이다.
그러나 강교수가 주로 공개된 자료를 통해 분석한 반면, 대학시절부터 이른바 강남좌파들의 위선적 행태를 몸소체험한 필자 입장에서는 강남좌파의 해악은 강교수의 분석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판단하고 있다. 강교수도 지적한 강남좌파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진보 프로그램’은 단지 실천이 안 되고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최소한의 사회적 진보의 길까지 원천 봉쇄해버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강남좌파는 대한민국의 기득권세력의 권력을 더욱 공공히 해준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철밥통 공무원 등 기득권세력들이 사회개혁 저지를 위해 좌파에 침투시킨 스파이들이 아닐까 의심을 해볼 정도이다.
강남좌파들은 부유한 부모의 돈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했든 유럽에서 유학을 했든 대부분 유럽식 사민주의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들이 선동을 목적으로 비판하는 미국과 한국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계층 이동이 활발한 나라이다.
미국의 100대 부자 중 71명이 창업가, 한국은 22명에 불과
2009년 3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미국 부자 100명 중 71명이 창업자였다. 하지만 국내에서 스스로 부를 일군 창업자는 100대 부자 중 겨우 22명이었다. 미국 3대 부호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워런 버핏(버크셔해서웨이 대표), 로렌스 엘리슨(오라클 창업자)은 모두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20대 부자 중 15명이 자수성가했고, 5명이 상속을 받은 부자였다.
한국은 10대 부자가 모두 대기업 계승자 출신이다. 20대 부자 가운데서는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13위·9495억원)과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이사(20위·8082억원)만이 스스로 부를 일구었다. 2008년 매출액이 1조원 이상인 상장기업 147개 가운데 독자 창업한 회사는 웅진과 NHN 단 2개뿐이었다.
빌게이츠와 워렌버핏의 사례에서 보듯 미국은 창업한지 20-30여년 정도만 지나면 10대 기업을 넘어 1위 기업까지 올라설 수 있는 나라이다. 한국은 현재로서는 이러한 기업 간 수직이동이 막혀있는 상황이다. 청년기업가들의 모임 실크로드CEO포럼 회원들이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국내 창업시장과 미국의 창업시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금융투자 시장이 경직되어있다. 빌게이츠나 구글의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등은 현재 한국돈으로 약 5천만원의 자본금으로 창고에서 창업했지만, 미국의 엔젤투자 시장 덕에 2차 자본 투자금을 조달받아 급성장할 수 있었다. 벤처거품 이후 국내에서는 이러한 성장방식은 불가능하다.
둘째, 인터넷과 미디어 등 콘텐츠 유통시장이 제대로 정비되어있지 않다. 현재 한국의 대기업들은 기본적으로 제조업 중심이다. 청년기업가들이 이러한 제조업으로 대기업을 넘어서기란 설비투자, 마케팅 등에서 엄청난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 새로운 기업들은 인터넷과 미디어 콘텐츠 유통 기반으로 성장해야 한다. 명확한 저작권법과 인터넷상에서 네이버와 같은 문어발식 독과점 재벌이 나올 수 없는 미국의 인터넷시장 환경 등과 달리 국내 인터넷은 무법천지가 되어있고, 미디어사업은 온갖 규제로 묶여있다.
셋째, 미국과 달리 대한민국의 문화시장은 자폐적 수준으로 닫혀있다. 미국은 전 세계의 모든 문화를 자국의 시스템으로 흡수하여, 문화생산의 원동력으로 활용한다. 반면 한국의 경우 영화, 드라마, 방송, 음반 시장의 절대 다수를 국내물로 채워넣고 있다. 문화 개방이 더디기 때문에 문화네트워크를 통한 글로벌 진출도 함께 막힌다.
강남좌파들, 청년창업 활성화 앞길 막고, 공무원 조직 확충만이 대안?
위의 세 가지의 결정적인 차이, 금융시장 개방, 인터넷 법질서 확립, 문화개방을 누가 막고 있는가. 바로 좌파세력, 개중에서도 부자 부모님의 돈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한 강남좌파 지식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말 이들 강남좌파의 주장을 그대로 외운 듯한 20대 좌파 리더들과 토론을 해본 바 있다. 이들의 주장은 “대기업 취업은 자유를 박탈한다”, “창업은 위험하다”, “중소기업은 성장 가능성이 없다”로 압축된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공무원을 대폭 늘여 모두가 평생 직장이 보장된 공무원으로 살면서, 강남좌파들과 겉멋든 취미생활을 하겠다는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학비 전액 면제, 무상급식, 무상 교통, 취업보조금 등 이들의 취미생활을 위해 국민혈세를 투입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망상적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옳고 그름을 떠나 국민소득 2만달러짜리 국가, 1년 예산 300조원짜리 국가에서 대체 이런 발상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현재 50대보다도 취업률이 떨어진 30대, 매년 취업률이 감소하는 20대의 현실을 감안하면 일단 인터넷, 대중문화, 미디어 시장이라도 개혁하여 이들이 진취적으로 기업을 창업하여 일자리를 늘여나가는 게 1순위이다. 문제는 강남좌파들의 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주장 탓에 이러한 현실적 논의가 막혀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대학시절 주로 강남좌파들로 구성된 운동권 학생들에게 “진보와 개혁 외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약속하라”고 다그쳤다. 단 한 명도 이를 약속한 바 없고, 현재의 강남좌파들이나 대학시절 운동권 출신들이 2011년 1월 현재에도 이를 추진하지 않고 있다.
첫째, 계급갈등 이야기하기 전에 운동권 학생 전원은 부자 부모님의 돈으로 유학이나 고시 준비하겠다는 발상을 버리고 상속재산 모두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하라.
둘째, 한국 사회 학력차별의 온상인 각 고등학교와 대학 동문회에 참여하지 않기로 약속하라.
셋째, 연구는 하지 않고 평생 놀고 먹는 대학교 교수들과의 싸움부터 시작하라.
그 당시 돌아온 답은 “이 모든 것은 계급해방과 노동해방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부자들의 레크레이션용 ‘노동해방’ 놀이 이외에 자신들의 기득권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개혁은 일체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변희재 /객원논설위원,미디어워치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