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도자의 리더십, 제철-박태준 조선-정주영 '영웅 신화' 만들어내다
  • 朴正熙와 朴泰俊과 포항제철:
    "실패하면 우리 모두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일체의 간섭을 배제하도록 보장한 '종이 마패'를 써주다. 
    趙甲濟    
     
     1973년 7월 3일 오후 2시 포항종합제철 1기 설비종합준공식이 현장에서 있었다. 朴 대통령이 國運을 걸고 추진하던 중화학공업 건설의 첫 물증이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朴 대통령은 국내외의 반대를 꺾어 가면서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세계개발은행(IBRD)과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등 차관을 대야 할 외국기관들이 한국의 실력으로는 종합제철공장 건설이 어림도 없다는 평가를 하고 있었다. 朴忠勳(박충훈) 당시 경제부총리도 소극적이었다. 
     

  •  無望(무망)해 보이던 상황을 타개한 것은 朴 대통령의 집념과 의지였다. 최근 발간된 ‘포스코35年史’는 1969년 5월 22일의 朴 대통령 지시를 ‘자주적 103만 톤 사업계획수립’ 지시라고 표현했다. 이날 朴 대통령은 朴 경제부총리, 金正濂 상공부 장관, 朴泰俊 포철 사장 등에게 “세계개발은행에만 의존하지 말고 자주적 판단下에서 계획을 추진하되 정부는 이를 강력히 지원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규모와 경제성, 그리고 차관선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의 판단’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6월 2일 朴 대통령은 미온적이던 朴 부총리를 경질하고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金鶴烈(김학렬) 씨를 부총리로 임명했다.
     
     우리가 주체가 된 계획을 짜보자고 하니 규모도 외국기관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했던 租鋼(조강) 年産(연산) 60만 톤의 거의 두 배인 103만톤으로 늘었고, 그것도 200만 톤으로 즉시 증설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차관선도 歐美 루트를 포기하고 對日청구권 자금에서 조달하기로 계획하고 일본 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본통인 朴泰俊 회장은 일본의 政·財界(정·재계) 사람들을 만나 청구권 자금을 쓸 수 있도록 호소하고 철강 3社로부터는 기술제공에 협력한다는 각서를 받아내는 등 포철 건설의 主役(주역)이 되었다.
     
     1970년 4월 1일부터 외자 711억 원(1억 7,800만 달러), 내자 493억 원 합계 1,204억 원을 투자하여 건설한 103만 톤짜리 포철 준공식 치사에서 朴 대통령은 1980년대를 향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 공장은 금년부터 계속해서 260만 톤으로 확장 공사를 하고, 또 계속해서 1979년 말까지는 700만 톤 규모까지 확장할 계획을 지금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1980년대에 가면 우리나라의 철강 수요가 국내만 하더라도 약 1200만 톤 내지 1300만 톤을 넘을 것이라는 추정下에 포항종합제철의 1차, 2차 확장 공사와는 별도로 이와 병행하여 年産 약 1000만 톤 규모의 제2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지금 추진 중에 있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을 할 때가 되면 총수출량에 있어서 중화학 분야의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약 60%를 넘게 될 것입니다. 100억 달러 수출에서 약 60억 달러 이상은 중화학 분야의 제품이 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朴 대통령의 예측이 수학적으로 적중했다는 점이다. 포항제철은 1978년 12월 8일 제3기 증설로 年産 550만 톤 규모를 갖추었다. 이어서 1981년 2월 18일엔 제4기 증설로 850만 톤 규모로 커졌다. 朴 대통령이 예언했던 대로 全斗煥 정부는 1980년대에 광양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여 1990년대에는 年産 2000만 톤 생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朴 대통령의 위대성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시킨 점이다.
     


  •  ‘포철 神話(신화)’의 연출자는 朴正熙, 주연배우는 朴泰俊이었다.
     
     1969년 12월 포항종합제철 공사현장에서 朴泰俊 사장은 황량한 모래벌판에 사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외쳤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이대환 지음, 현암사 발간 《박태준》에서 인용)
     
     朴泰俊 사장은 포철을 지을 때부터 정치적 압력이나 관료적 행정처리, 그리고 인사청탁을 배제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우선 일본에서 설비를 구매할 때 포철이 공급업자의 선정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정부기관을 통해서 해야 하는 것을 시정해야겠다고 별렀다. 문제는 朴 대통령에게 直訴(직소)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일이었다.
     
     1970년 2월 3일 朴 대통령이 포철의 공사진척 상황을 보고받고 싶어 한다고 비서실에서 朴 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위에 인용한 책에 따르면 朴 사장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브리핑을 하려고 하니 朴 대통령은 배석 비서관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고 한다. 이윽고 朴 대통령이 말했다.
     
     “완벽주의자인 임자가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텐데, 보고는 무슨 보고. 그래 일은 순조롭게 되어 가나?”
     
     “구매절차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건가?”
     
     朴 대통령은 설비구매 과정에서 포철이 당면한 어려움과 시정건의를 朴 사장으로부터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건의한 내용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 봐.”
     
     朴 사장이 메모지에 쓴 것을 읽어본 朴 대통령은 메모지의 상단 좌측 모서리에 친필서명을 한 뒤 도로 내밀었다.
     
     “내 생각에 임자에게는 이게 필요할 것 같아. 어려울 때마다 나를 만나러 오기 거북할 것 같아서 아예 서명해 주는 거야. 고생이 많을 텐데 소신대로 밀고 나가게.”
     
     포철 역사에서 ‘종이마패’로 불리는 이 메모지를 朴 사장은 한 번도 써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朴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등뒤에 있다는 확신이 朴 사장으로 하여금 포철을 정치와 행정의 견제나 간여로부터 지켜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金正濂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 대통령은 공기업 사장 중 朴泰俊 사장만 청와대에서 獨對했다고 한다.
     

  • 정주영의 현대조선 신화는...

     朴 대통령은 어떤 면에선 기업인들의 조련사이기도 했다. 鄭周永 같은 야성의 인물도 朴 대통령 앞에서는 유순해졌다. 朴 대통령의 私心 없는 독려가 기업인들을 마음에서부터 움직였다.
     
     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에게 조선업을 권유했던 이는 金鶴烈 당시 경제부총리였다. 鄭 회장은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도입하기 위하여 일본·미국을 돌아다녔다. 鄭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신 나간 사람’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鄭 회장은 金 부총리를 찾아가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기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金 부총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鄭周永 회장이 나서서 하겠다고 했으니 조선소가 꼭 되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金 부총리는 “이제 와서 못 하겠다는 보고를 올릴 수 없으니 함께 들어가서 직접 대통령한테 말하라”고 했다. 며칠 후 金 부총리, 鄭 회장, 朴 대통령이 한 자리에 앉았다. 鄭 회장이 말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쫓아다녀 봤지만 일본도 미국도 아예 상대를 안 해줍니다. ‘아직 초보적인 기술단계에 있는 너희가 무슨 조선이며 몇십만 톤이냐’는 식이니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朴 대통령이 역정을 냈다.
     
     “金 부총리, 앞으로는 鄭 회장이 어떤 사업을 한다고 해도 전부 거절하시오. 정부가 상대도 하지 말란 말이오.”
     
     그러고는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朴 대통령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鄭 회장한테도 권했다. 鄭 회장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거절할 입장이 아니라 朴 대통령이 불을 붙여 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울 수밖에 없었다. 朴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그래, 그거 하나 못 하겠다고 鄭 회장이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해요? 처음에 하겠다고 할 때는 일이 쉽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것 알았을 거 아뇨? 그러면서도 나선 거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그저 한 번 해보고는 안 되니까 못 하겠다, 그러는 게 있을 수 있소?”
     
     鄭 회장은 할 말이 없었다.
     
     “이건 꼭 해야만 하오. 鄭 회장! 일본·미국으로 다녔다니, 그럼 이번에는 구라파로 나가 찾아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 빨리 구라파로 뛰어가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열심히 뛰어보겠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 中에서/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