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서 독립을 호소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이승만의 예언은 맞아들어가기 시작했다.
    한국 독립을 가져다 줄 일본과 미국의 전쟁 가능성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기 위한 국제연맹 총회가 1933년 초에 열리게 되자,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스위스의 제네바로 갔다.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이었지만, 경비는 하와이 교민들이 지원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의정원과의 갈등으로 1925년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지만, 이때는 김구가 이끌게 된 임시정부와의 관계가 좋아진 상태였다.

  • ▲ 런던에서 제네바로 가는 도중 파리비행장에 내린 이승만.(1933. 1. 4) 뒤에 보이는 비행기가 이승만이 평생 처음 타 본 비행기였다. 이래 글씨는 이승만의 친필이다.
    ▲ 런던에서 제네바로 가는 도중 파리비행장에 내린 이승만.(1933. 1. 4) 뒤에 보이는 비행기가 이승만이 평생 처음 타 본 비행기였다. 이래 글씨는 이승만의 친필이다.


       이승만은 회담이 시작되기 전인 1932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런던과 파리를 거처 제네바에 도착했다.
    그리고 각국의 대표들과 기자들을 만나 한국 독립 문제를 의제로 채택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승만은 일본에게 학대받는 민족들 가운데는 만주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도 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을 독립시켜 일본을 견제케 해야만 동양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일본의 괴뢰인 만주국의 건국에 반대함은 물론, 만주의 한인들을 중립국인으로 대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한 주장은 <주르날 드 쥬네브>, <라 트리뷴 도리앙>,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어 분트>에 실렸다.
    국제연맹 부설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도 연설했다. 국제연맹 사무총장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승만의 호소는 회의장 주변에서 적지 않은 반응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제는 끝내 총회 의제로 채택되지 못했다.

  • ▲ 제네바에서 발간되던《라 뜨리뷴 도리앙》1933년 2월 21일자 머릿기사에 나타난 이승만. 이 기사는 만주문제와 동양정치를 논하고 이승만의 경력과 그의 주장을 자세히 소개했다.
    ▲ 제네바에서 발간되던《라 뜨리뷴 도리앙》1933년 2월 21일자 머릿기사에 나타난 이승만. 이 기사는 만주문제와 동양정치를 논하고 이승만의 경력과 그의 주장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것은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다.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 영국, 프랑스는 극동에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국제연맹 사무국은 일본의 만주 침략 과정을 조사한 '리튼 보고서'조차 이승만에게 보여 주지 않을 정도로 일본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므로 회의가 끝났을 때 이승만은 좌절감에 빠졌다. 그때 그에게 동정적이었던 일부 외국인들은 소련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해볼 것을 권유했다. 소련은 일본의 만주 침략에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에 대해 호의적일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인 이승만이 소련 비자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친분이 있는 오스트리아 주재 중국 대사관의 대리공사 동덕건(董德乾) 박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 비엔나로 갔다. 그리고는 중국 대사관에서 소련 비자를 받는 데 성공했다.

       1933년 7월 19일 이승만은 신분을 숨긴 채 비엔나에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 역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역에 내리자 마자 소련 관리들로부터 즉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때 모스크바에는 일본 철도청 책임자가 와 있었다. 소련이 운영권을 가지고 있던 만주 동청철도(東淸鐵道)를 사려고 흥정을 하기 위해서 였다. 그래서 소련은 이승만 문제로 일본 대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다음날 비엔나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는 프랑스의 니스로 가서, 1933년 8월 10일 뉴욕 가는 배를 탔다.

  • ▲ 제네바의 국제연맹 본부 앞에 선 이승만.(1933. 5. 2)
    ▲ 제네바의 국제연맹 본부 앞에 선 이승만.(1933. 5. 2)



    헌신적인 아내가 될 프란체스카와의 만남

       이처럼 희망과 좌절 사이를 헤매며 분투하고 있는 동안, 이승만은 헌신적인 아내가 될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철물 무역과 소다수 공장을 경영하는 중소기업가의 세 딸 중 막내로, 아버지 사업을 맡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승만이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총회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1933년 초에 처음 만났다.

  • ▲ 소녀시절 프란체스카 도너.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네바에 갔던 이승만은 평생의 반려자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다.
    ▲ 소녀시절 프란체스카 도너.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네바에 갔던 이승만은 평생의 반려자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비엔나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제네바에 온 길이었다.
       만남은 저녁 식사 때 붐비는 호텔 식당에서 자리가 모자라 이승만이 두 모녀와 합석을 하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이때 이승만은 58세, 프란체스카는 33세였다. 
       제네바에 잠시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프란체스카가 떠난 다음 이승만이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비엔나에 들르면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신부가 될 도너 양을 초청할 수가 없었다. 미국 시민권이 없는 무국적(無國籍) 망명객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프란체스카는 정식으로 이민을 신청해 1년 뒤 독자적으로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1934년 10월 8일 두 사람은 뉴욕의 몽클래어 호텔에서 존 헤인스 홈즈 박사와 윤병구 목사의 공동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결혼은 동지적 결합이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이승만과 마찬 가지로 그의 모든 것을 한국 독립을 위해 바첬기 때문이다.

  • ▲ 신혼여행을 마친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부부.
    ▲ 신혼여행을 마친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부부.


       이승만은 부인을 데리고 생활 본거지인 하와이로 가려 했다. 그러나 하와이의 동지회 회원들과 한인기독교회 교인들은 이승만 혼자만 올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서양인 부인을 얻었다는 사실에 교민들이 반발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집스럽게 아내를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이 1935년 1월 25일 호놀루루 항에 도착했을 때, 놀랍게도 부두에는 수많은 교민들이 나와 열렬히 환영했다. 하와이의 신문 <호놀루루 애드버타이저>와 <스타 불레틴>도 그들의 도착을 크게 보도했다. 도착 다음 날에는 1천명이 참석한 환영 파티가 열렸다.

  • ▲ 이승만 부부 환영대회 열어준 하와이교민들.
    ▲ 이승만 부부 환영대회 열어준 하와이교민들.


       힘을 얻은 이승만은 하와이 여러 섬을 다니면서 한인들을 격려하고, 한인기독교회와 한인기독학원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는 한국의 독립이 무장투쟁이 아닌 외교(外交)와 여론 조성의 방법을 통해 이루질 수 있다는 평소의 신념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실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시기에도 외교독립론을 고집

       이야기를 앞으로 되돌리자. 1933년 8월 제네바에서 미국으로 돌아 온 이승만은 국제연맹 총회 참가 결과를 한국인들에게 보고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았다. 미국인들에게는 일본과 손을 잡고 태평양 지역에서 평화를 유지해보려는 대외정책이 잘못된 것임을 일깨우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1933년 9월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 주 뷰트에 들러 <몬태나 스탠더드>지와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 들러서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비판한 기사가 났기 때문에, 12월에는 그것을 반박하는 글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실었다.  

       이처럼 이승만이 분주하게 뛰고 있는데도, 일부 재미 교포들은 그에게 냉담했다. 샌프랜시스코에 한 달 동안 머무르고 있었는데도 안창호와 평안도 세력이 우세한 국민회의 <신한민보>는 그의 행적을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국제 정세도 이승만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일본은 약해지기는커녕, 파시스트 국가인 독일, 이탈리아와 손을 잡음으로써 그 지위가 더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에 따라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실현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독립의 전망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의 지지자들마저도 그에 대한 오랜 동안의 헌신과 희생에 지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주도권도 이승만의 반대파에게 넘어 갔다. 시련의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외교독립론(外交獨立論)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언젠가는 일본과 미국이 무력충돌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은 확실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그때를 대비해서 미국 정부와 미국 여론을 확실하게 잡아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