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련의 한반도 개입 조짐이 나타나다

  • ▲ 일본의 패망전야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싸우던 시절 워싱턴의 이승만.
    ▲ 일본의 패망전야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싸우던 시절 워싱턴의 이승만.

       
    이승만이 볼 때, 일본이 제2차대전에서 패배할 경우에 그 식민지인 한반도는 소련에게 넘겨져 즉각 공산화될 위험성이 컸다.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하는 좌우합작 연립정부가 들어서서 천천히 공산화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한 이승만의 우려는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언론보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3년 3월 하순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이 미국을 방문해 프랭클린 루스즈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였다. <시카고 썬>지에는 두 사람이 소련이 한반도를 차지하는 문제와 신탁통치 문제를 상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월드 어페어즈> 1943년 6월호에도 미 국무부가  한국인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소련에 대한 특별 배려 때문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승만은 강대국들이 한국에 대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그러한 음모의 가능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45년 봄에 <한국 사정>이란 소책자를 발행해서 배포했다.

  • ▲ 스탈린은 미국의 극동전선 참전 요구를 받자 한반도 점령을 댓가로 요구했다.
    ▲ 스탈린은 미국의 극동전선 참전 요구를 받자 한반도 점령을 댓가로 요구했다.


       그 책자에서 이승만은 중경의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소련이 구체적인 요구를 제시할 때까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최종결정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은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일본과의 전쟁에 소련을 끌어들이려 했고, 그것에 대해 소련은 대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책자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소련군의 도움을 얻기 위해 한국인과 같은 약소민족을 희생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무장투쟁을 위해 한인특수부대를 창설하려 하다

        이승만은 흔히 외교독립론자로 무장투쟁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일본군과 싸울 한인 전투부대를 창설하려고 노력했다. 무장투쟁이 중경의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관계가 좋아진 김구의 임시정부에게 일본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도록 권유했다.
    그리고 미국정부에게는 무기대여법에 따라 임시정부를 원조하도록 촉구했다.
       보다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가, 그는 미군 정보조정국(COI)에 대해 재미한인들로 독립적인 특수부대를 창설해서 일본에 대한 전투에 투입시켜 줄 것을 계속 요청했다.
       미군과의 연결은 나중에 그 기구의 중국 책임자가 된 에쓴 맥도웰 게일과 알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에쓴 게일은 이승만이 한국에 있을 때 아주 가까이 지내던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조카였다.
        게일을 통해 이승만은 그 기구의 책임자인 도노반과 2인자인 프레스톤 굿펠로우와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1941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열린 여러 차례의 정보조정국 회의에도 직접 참석해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 ▲ 이승만을 도와준 굿펠로가 서울 경무대를 방문했다.
    ▲ 이승만을 도와준 굿펠로가 서울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승만은 우선 그 준비를 위해 재미교포 청년인 장석윤(張錫潤)을 미군에 입대시켰다. 그에게는 중경의 김구와 연락하기 위한 이승만의 편지를 휴대시켰다.
       1942년 6월 이승만은 미 전쟁부로부터 게릴라 훈련에 필요한 한인지원자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50명의 명단을 제출했다. 그들 가운데는 나중에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일했던 장기영, 이순용, 장석윤, 김길준, 정운수, 김세선, 한표욱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부는 그 계획이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다.
       정보조정국(COI)에서 이름을 바꾼 전략사무국(OSS)은 1944년 중국을 거치지 않고 한반도로 직접 한인 게릴라 부대를 투입하려는 냅코(NAPKO) 계획을 세웠다.

  • ▲ OSS 한국 그룹 대장 함용준의 OSS 관련 서류. 함용준은 1945년 8월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계 요원 9명을 이끌고 중국에 파견되어 한국 침투조를 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 OSS 한국 그룹 대장 함용준의 OSS 관련 서류. 함용준은 1945년 8월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계 요원 9명을 이끌고 중국에 파견되어 한국 침투조를 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군에 입대한 장석윤은 일본군이나 일본군 노무자였다가 미군 포로가 되어 위스콘신 주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한인들과 접촉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포로수용소에 잠입해 사이판 노무자 출신 3명, 미얀마 전선에서 탈출한 학병 출신 3명을 특공대원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시민으로 미 육군에 입대한 뒤 OSS에 배속된 장석윤, 유일한 등 6명, 그리고 민간인 출신으로 OSS에 들어온 김강,변준호 등 7명이 합세했다. 그래서 모두 19명의 한인들이 이른바 ‘냅코’ 작전에 차출되었다.
       이들은 샌프랜시스코 연안의 한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낙하산 훈련 등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끝낸 다음, 그들은 ‘냅코’ 작전에 대한 중국 및 태양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령관들의 승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중국전구의 웨드마이어 장군, 태평양지역 육군사령관 맥아더 장군, 태평양 지역 해군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승인을 꺼렸다. ‘냅코’ 작전이 기존의 전투력을 분산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이 항복했다. 그에 따라 그 작전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중국 외교부장이 좌우합작을 강요하다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은 좌우합작이라는 명분 밑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당시 미 국무부는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국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미국의 정책에 동조한 사람이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 T.V.쑹)이었다. 따라서 그는 반공,반쏘주의자인 이승만을 크게 괴롭힌 인물이 되었다.  
       송자문은 장개석 총통의 처남이었으면서도 소련과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하고 있던 기회주의자였다. 그 때문에 그는 궁극적으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패망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 ▲ 송자문. 장개석 총통의 처남이며 소련과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하고 있던 기회주의자로 좌우합작을 강요하며 반공, 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을 괴롭힌 인물이다.
    ▲ 송자문. 장개석 총통의 처남이며 소련과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하고 있던 기회주의자로 좌우합작을 강요하며 반공, 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을 괴롭힌 인물이다.


       송자문은 일본이 패망해 한국이 독립될 경우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권력을 잡기를 바랬다. 특히 김규식· 김원봉· 조소앙과 같은 좌파 성향의 인물들이 집권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우파인 김구에게 중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미끼로하여 임시정부에게 김규식-김원봉과 같은 좌파를 받아 들이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 결과  1942년 12월에 임시정부가 ‘좌우합작’ 정부로 바뀌게 되었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변질에 대해 크게 분개했다. 그래서 중국의 김구에게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구는 ‘좌우합작’을 해야만 중국의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송자문은 미국 정부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헐뜯었다. 너무나 분열이 심하고 허약해서 국제적 승인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중국이 겉으로는 일본과 대립하는 한국인들을 도우면서도 속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바라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이중적인 행동이었다.
       중국은 오랫 동안 한국을 자기네 속방으로 생각해 왔고, 그 생각은 제2차대전 당시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 때문에 중국은 자기 영토 안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