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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조선공산당, 소련 지령따라 폭력투쟁...전국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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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이 좌익 탄압을 시작하자, 위기를 느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폭력투쟁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그는 북한의 소련군으로부터 지침과 지원을 받아 총파업을 지시했다. 파업의 전면에 조선공산당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허헌과 김원봉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게 지휘를 맡겼다.
행동은 조선공산당의 외곽단체인 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맡았다.
좌익의 파업은 서울과 부산의 철도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되어 각 부문으로 확대되었다. 이른바 ‘9월 총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을 지원하기 위해 대학과 전문학교, 심지어는 중학교에서도 동맹휴학투쟁이 일어났다.
이승만, 파업-폭동에 맞선 대한노총을 격려
파업으로 전국의 교통통신망과 산업이 마비되자, 이에 맞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파업분쇄 투쟁에 나섰다.
도시지역의 ‘9월총파업’은 농촌지역의 ‘10월폭동’으로 이어졌다.
대구에서 일어난 총파업은 근처의 경북지역 농촌에서 농민폭동을 유발시켰다.
농민폭동은 전국의 농촌지역 으로 확대되어, 전국의 131개 군 가운데 약 절반인 56개 군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미군정청은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폭동을 진압했다.
쫓긴 좌익들은 산악지대로 들어가 게릴라가 되어 훗날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는 무장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김일성, 공산주의 대신 민주주의..공산당 대신 노동당으로
그 동안 남한 좌익들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46년 11월에 좌익 3당으로 불리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이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은 공산주의라는 말이 일반 대중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통치자들의 선전으로 대중에게 공산당은 소련과 같은 참혹한 폭력혁명을 일으키는 사무서운 조직이라는 인상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일성은 공산주의라는 말 대신에 민주주의라는 부드러운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공산당이란 명칭 대신에 복지정책의 상징인 영국 노동당을 연상시키는 노동당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그 결과로 북한의 좌익 정당들을 북조선노동당으로 통합하고, 남한의 좌익 3당에게도 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이승만, 자유총선거 겨냥 민족대표자대회
우파들의 조직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1947년 7월 이승만이 이끄는 독립촉성국민회는 전국에 걸친 총선거 방식으로 200명의 민족대표를 선출했다. 그것은 미 군정의 입법의원이 통과시킨 선거법에 따른 것으로, 앞으로의 정부수립은 자유총선거(自由總選擧)를 통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이승만의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민족대표자들은 1947년 7월 10일 배은희 목사를 의장으로 ‘민족대표자대회’를 열고, 대의원을 선출했다. 선출된 대의원들은 기존의 민주의원과 국민의회를 대신해 앞으로 의회의 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것은 앞으로 세워질 정부는 그러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이승만의 구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김구, 임시정부 법통따른 집권 주장
이와는 달리 김구는 임시정부 법통에 의한 정부수립을 주장했다.
그 때문에 민족대표자대회와 국민의회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과도입법의원을 좌경시키려는 미군정에 반발 남한에는 정부가 설 가망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는 불안하고 그 기능은 거의 마비되어 있었다. 1947년 8월 남한의 산업시설은 20%만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 일본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피난민이 쏟아져 들어옴에 따라 실업자는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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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남북 통일 정부 수립에 동의해줄 리가 없는데도, 미 군정청은 소련과의 협조에 매달렸다.
그 준비 작업으로 하지 장군은 1946년 6월 김규식, 여운형과 같은 중도파를 내세워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는 10월에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케했다.
미 군정, 좌우합작 7원칙 발표
그것은 이승만이 의장으로 있는 우파 성향의 ‘민주의원’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1946년 8월 하지는 좌우합작위원회를 토대로 미 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우익은 찬성했다. 어떤 형태의 공식 기구라도 설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익은 맹렬히 반대했다. 남한에서 과도정부가 세워질 기초작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는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90명의 의원 가운데 45명은 군정장관이 임명하고, 나머지 45명은 도,시 단위로 선출하겠다고 발표했다. 선거는 일 주일 기간에 지역별로 선거일을 택하여 20세 이상의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실시된 선거였기 때문에 투표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다. 또한 대부분 지방 유지들이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민선의원으로 보수세력이 많이 당선되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촉세력이 17명, 김성수를 지지하는 한민당 세력이 14명, 김구를 지지하는 한독당세력이 3명에 이르렀다. 무소속 가운데도 우익이 많아 민선의원의 거의 대부분인 40명에 이르렀다.
민선의원 선거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가저 오게 되자, 하지 중장은 한민당 후보들이 당선된 서울과 독립촉성국민회 후보들이 당선된 강원도의 선거를 무효화시켰다. 그리고는 재선거를 지시했다. 선거 부정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임명하게 되는 관선의원 45명을 좌파 성향의 인물들로 채웠다. 그들 가운데는 독립운동 시절 미국에서 이승만을 괴롭혔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김호와 김용중도 있었다.
하지, "이승만 권력 못잡게 하겠다"
1946년 12월 12일 미군정의 의회 역할을 하게 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문을 열었다.
의장은 김규식이 맡았다. 그에 따라 기존의 민주의원은 군정자문기관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미약하나마 우익연합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계속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적극 개입으로 구성된 과도입법의원 마저도 하지 중장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첫 번째 모인 회의에서 입법의원은, 미 군정청의 뜻과는 어긋나게,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했기 때문이다.
안재홍(安在鴻) 의원만이 그것에 동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하지 중장은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게 되었다. 그것은 미군정의 ‘한인화’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그 이후로 미군은 각 부처의 고문으로 물러나고 실무적 행정을 한국인에게 완전히 넘겼다. 그리하여 1947년 6월에는 미군정의 한국인 기관을 통털어서 ‘남조선과도정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지 중장이 서울과 강원도의 과도입법의원 선거를 무효화하고 관선의원에 좌파 성향의 인물들을 많이 기용하자,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가 더욱더 나빠졌다. 두 사람이 마주친 자리에서 하지는 이승만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에 대해 이승만은 앞으로는 하지에 공개적으로 맞서겠다고 응수했다.
김구, 쿠데타로 미군정 접수 구상
그것을 계기로 이승만과 김구(金九)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신탁통치 반대에 있어서는 동지적 입장이었지만, 정부 수립 문제에 있어서는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자유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던 데 대해, 김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정부를 세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 수립이 자꾸 늦추어 지자, 김구는 임시정부 세력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미군정을 접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볼 때 미군정과의 정면 대결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국에 직접 가서 한반도 정책을 바꾸도록 호소하려고 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는 한반도의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 대해 김구는 이승만이 미국에 가서 자주독립 보장을 얻어 오지 못하면 쿠데타에 호소하겠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