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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국립오페라단 초청 공연 '가면무도회'에서 '레나토'역으로 데뷔할 당시 오페라계의 세계적 거장인 지휘자 마르코 발데리 선생님이 지휘를 하셨어요. 그때 제게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제게 '당신은 동양의 피에로 카푸칠리'라고 해주셨죠. 성악을 시작하고 난 뒤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을 한 번에 씻겨 내려주는 최고의 찬사였어요. 지금 성악의 꿈을 키우고 있는 학생들과 또 현직에 있지만,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음악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있다면 언젠간 꼭 누군가로부터 박수받는 성악가가 될 수 있다' 라고 말이죠."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바리톤 석상근을 최근 서울 서초동의 한 연습실에서 만났다. 생각보다 아담한 체구에 한 번 놀라고 자신의 체구를 넘어서는 극강 성량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특히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나오는 대표적인 아리아 '나는 거리의 만능 일꾼'을 완벽에 가깝게 소화하는 바리톤 석상근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바리톤 피에로 카푸칠리가 떠올랐다.
그의 실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독일 뮌스터시립극장에서 베르디의 작품 일 트로바토레 '루나백작' 역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후 곧이어 폴란드 바르샤바(Wielki) 국립오페라극장 '나부코' 공연을 준비 중이다. -
뿐만 아니라 내년 5월에는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오렌이 상임으로 있는 이태리 살레르노(Salerno) 오페라 극장에 초청됐다. 그는 '롯시니의 세빌라리의 이발사'에서 '피가로' 주인공역으로 데뷔를 앞두고 있다.
타고난 재능으로 성악을 시작하게 됐을거라는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성악을 먼저 시작했던 친구가 '목소리 좋은데 성악 한 번 해봐'라고 무심코 던진 말에 '성악'에 대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음악가는 너무 힘든 길'이라는 부모님의 만류하에도 불구하고 성악을 하기로 결심했죠."
우연한 기회에 성악을 시작한 석상근은 영남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한 후 이태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2000년, 이태리로 떠나 중부도시인 '뻬르지아(Perugia)'에서 본격적인 성악 공부에 돌입했다. 이후 좋은 선생님을 찾기 위한 열정으로 로마나 노바라(Novara)에도 머무르기도 했다.
이후 밀라노 시립음악원 가곡, 오페라과를 수료했으며 피에트로 마스캇니 국립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꾸준한 노력 끝에 쟈코모 라우리 볼피 국제 성악콩쿨 2위를 비롯해 비옷띠, 쟈코모 아라갈, 레나타 테발디, 쥴리에타 시묘나토 등 국제 성악콩쿨에서 잇따라 수상하며 바리톤으로서의 세계적 입지를 점차 넓혀갔다.
7년의 이태리 유학 생활을 끝내고 독일로 건너간 그는 수많은 에이전시 오디션 끝에 1년 반 후인 2008년, 뮌스터 국립극장 전속 가수로 무대에 서게 됐다.
"사실 이태리에서 7년을 공부한 후 독일로 넘어가 적응하는 건 제가 자신했던 것만큼 쉽지는 않았어요. 언어를 조금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간 거죠. 그래도 그 당시 젊은 패기로 '한 번 해보자'라는 자신감이 컸어요. 이태리를 갈 때도 큰 준비 없이 부딪혀 보자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이태리에서 머문 7년이라는 시간이 큰 교훈으로 다가왔어요. 독일에서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이태리에서 받은 태양의 기운이 힘이 됐다고나 할까요?" -
도쿄 분카무라 홀에서 이태리출신 세계적인 메조소프라노 피오렌짜 코솟또와 함께 '일 트로바토레' 공연을 시작으로 2011년 서울 국립오페라단 초청 베르디작품 '가면무도회' 레나토 역으로 한국에서 화려한 첫 데뷔무대를 가졌다.
특히 그는 '나부코' 주역 데뷔무대를 통해 독일 음악전문평론가로부터 "바리톤 석상근은 노래와 연기가 혼연일체가 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야말로 감동적인 공연이었다"라는 찬사를 받으며 유럽 무대에서 성공적인 무대를 이어갔다.
"저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요. 제가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한국인들이 성악가로서 성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좋은 선생님, 좋은 연출가, 좋은 지휘자를 만나는 것은 성악인의 인생을 결정할 만큼 아주 중요한 부분이죠. 저는 이태리에서 공부할 때 많은 대가들을 만나서 테크닉을 참 많이 배웠어요. 좋은 연출가나 지휘자를 만나더라도 그들의 가르침을 흡수하려면 내가 배웠던 테크닉들이 기본이 돼야 한다는 거죠. 그 위에 레퍼토리와 연기, 예술성이 보태져서 시너지가 발휘되는 것 같아요."
석상근은 앞으로 레퍼토리가 풍부한 성악가로 자신을 빛내길 원하고 있다. 음악은 스포츠 경기와 비슷하다고 그는 말했다. 기본적인 자세와, 꾸준한 노력을 하면 어느정도 실력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자신만의 특색, 경험이 드러날 때 관객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저는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성악을 공부해왔습니다. 저는 '성악가'이기 때문에 수많은 음악인들 중에서 두각을 드러내려면 저만의 레퍼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풍부한 레퍼토리를 연구하고 연습해 폭넓은 저만의 음악세계를 관객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악이 단순히 노래만 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술 전반적인 부분에 있어서 총체적인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순히 발성 연습이나 노래 연습 이외에 악기나 작곡, 발레, 뮤지컬, 미술 관람 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많이 접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성악을 하는 사람은 단순히' 성악인'이 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한 마디로 종합 예술인이 돼야 한다는 거죠. 물론 실력은 중요해요. 노래하는 사람이 당연히 노래를 잘해야 하겠죠. 하지만 우리는 노래 한 곡으로 관객의 마음을 울려야 하는 무거운 임무를 지닌 사람들이에요. 그 작품을 완벽히 이해하고 불러야만 한다는 거죠. 따라서 그 작품에 나오는 시대의 문화, 의상, 건축, 역사 등 다양한 스토리를 '공부'해야 해요." -
수천 번의 무대를 섰던 그는 아직도 무대가 감격스럽고 떨린다고 말한다. 무대에서 연출을 어떻게 할지 몰라 두려움이 가득하던 어린 학생이었던 시절을 거쳐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공연을 마칠 때면 마음이 묘하다고 했다. 그는 본인처럼 성악가의 꿈을 키워가는 학생들을 위해서 진심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막 성악을 시작했을 무렵으로 돌아간다면 정말 더 열심히 할 것 같아요. 지금 이 자리에 올라와서 참 많은 것들이 보여요. 아직 어린 학생들을 보면 작품에 대한 인물연구를 많이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처음 성악을 시작할 때는 겉멋이 들기 쉽거든요. 발성과 테크닉에 힘을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레퍼토리나 역사, 인물연구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친구들이 많지 않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또 어릴수록 자신보다 인생경험이 풍부한 연장자를 많이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되짚어보고 조언해 줄 사람이 꼭 필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해요."
바리톤 석상근은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오페라극장 '나부코' 공연에 이어 2015년 5월 이태리 살레르노 오페라 극장에서 롯시니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공연을 앞두고 있다. 국내와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극장에 우뚝 서게 될 바리톤 석상근의 행보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