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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음악이 그렇듯 나 혼자서만 즐거운 음악도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관객으로 하여금 기대하고 기다리고, 다시 한 번 듣고 싶게 만드는 게 진정한 예술 아닐까요.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 것처럼 듣는 사람도 똑같이 사랑하게 만드는 게 바로 진정한 음악의 고수라고 생각해요."
유럽에서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두각을 드러낸 후 한국에 돌아와 여성 지휘자 중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 현재 유나이티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지휘자 김봉미의 말이다.
오는 28일 '뜨레 아미치와 함께하는 대한민국 경제 희망콘서트' 준비에 여념이 없는 지휘자 김봉미를 최근 서초동 유나이티드아트리움에서 만났다. 체구는 작았지만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수장으로서 김봉미 지휘자의 첫인상은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국내 클래식계에서 독보적인 여성 지휘자라는 타이틀이 따라붙는 것에 대해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아직도 배울 게 많다는 겸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성 지휘자'로서의 길이 쉬웠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독일에서 지휘 공부를 할 때 저를 의아하게 바라보거나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작은 동양인 여자가 지휘봉을 잡겠다고 하니 신기했나 봐요. 편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런 시선에 무뎌지려고 많이 애썼어요. 고진감래(苦盡甘來) 끝에 지금은 여러 오케스트라와 다양한 공연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공연이 참 많아요. 오랜 세월 음악을 공부했지만 저는 아직도 음악이 궁금하답니다."
그는 독일 에센 폴크방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다가 카셀 국립음대, 데트몰트 음대를 거치며 지휘자로 전향했다. 수년간 현지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하며 실력과 명성을 쌓은 그는 2008년 서울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전속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특별한 계기로 지휘봉을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에요. 가족 모두가 음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악과 나란히 살아왔다고 할까요. 지휘를 하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연습장과 공연장을 매일 드나들었죠. 지휘하는 모습만 보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의 부친은 한때 부산시향을 이끌었던 지휘자였으며 집안에 음악가들이 많아 그는 어렸을때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적 영향을 받아왔다.
"아버지의 지휘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제 미래상이자 꿈이 되더라고요. 지휘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 바로 사람들을 리드하고 음악을 만드는 거잖아요. 그 과정을 저는 현장에서 항상 생생하게 봐 왔어요. 그런데 대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 이후의 제 행보에 대해 코멘트를 해줄 사람이 없어졌어요. 외롭고 어려웠지만 어릴 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더 이상 날 이끌어주는 사람은 없지만 20년 간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을 무시할 수 없더라고요."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지휘자로서 리더쉽을 잃지 않기 위해 항상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는 그도 때로는 불쑥 외로움이 찾아온다고 한다.
"지휘자라는 위치가 다른 사람들과 의논을 하기 어려운 자리잖아요. 단원들은 왜 힘든지, 왜 잘 안되는지 서로 조언과 충고도 할 수 있지만 저는 혼자 고민을 해서 결정해야 하더라고요. 매 순간 제 결정이 곧 그 공연의 방향을 좌우하기 때문에 긴장의 연속이죠. 전 이럴 때 스스로를 카운슬링 하곤 해요. 또 다른 내가 돼서 다른 방향에서 생각할 수 있게끔 생각의 전환을 시켜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러다보면 제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떠오르곤 하더라고요."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는 물론 공연 전체의 키를 쥐고 있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아무리 프로여도 매번 부담과 긴장은 따라오기 마련. 지휘자 김봉미 또한 공연 순간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공연을 올리는 순간뿐만 아니라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까지 모두 감당해야하는게 부담인 것 같아요. 예측하기 힘든 상황을 대비해 최대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매일 연습을 하는 거잖아요.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벌어지면 버거울 때도 있지만 서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는 것 같아요. 연주자가 최대의 연주를 끌어낼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
김봉미는 현재 지휘자나 음악가를 꿈꾸는 후배들에 대한 애정 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음악가를 꿈꾸는 모든 후배들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 '정말 음악이 좋니?'라고요. 제가 지금까지 한 번도 이 길을 후회하지 않았던 건 음악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에요. 지인들은 제가 지휘를 할 때 살아 있는 생동감이 확 느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내 길을 잘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처음에는 지휘자라는 길이 집 앞 개울가인 줄 알았는데 발을 담그고 보니 태평양이더라고요. 끝도 없이 깊고 보이지 않는 모든 상황들의 연속이지만 전 그 음악이라는 바다가 정말 좋아요."
그는 오는 28일 '뜨레 아미치와 함께하는 대한민국 경제 희망콘서트'를 앞두고 설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번 콘서트는 김봉미의 지휘와 국내 및 세계무대를 누비며 활동하는 차세대 테너 3명이 결성한 '뜨레 아미치(Tre Amici)'와 새로 창단된 안다미로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이뤄진다. -
특히 이번 콘서트는 베르디, 푸치니, 도니제티의 곡을 각각 가장 색깔에 맞는 테너 3인이 소프라노들과 콤비를 이뤄 연주한다는 게 특징이다. 뜨레 아미치의 멤버인 테너 김기선, 김동원, 이동명과 함께 김지현, 이은희, 이명희 등 정상급 소프라노 3명이 출연할 예정이다.
"뜨레 아미치 콘서트는 갈라 콘서트로 구성돼 있어 다양한 노래와 연출 등을 모두 경험할 수 있어요. 같은 테너와 소프라노라도 음색과 감성, 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6명의 테너와 소프라노의 기량을 비교해보는 것도 즐거울거에요. 공연에 오시기 전에 그들의 대표 아리아를 알고 오시면 즐거움이 두 배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끝으로 그는 지휘자로서 작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말했다.
"먼저 관객들이 다시 찾고 다시 보고 싶은 지휘자가 되고 싶어요. 제가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해도 관객이 '김봉미의 공연은 오늘로서 충분하다'라고 느낀다면 그건 실패라고 생각해요. '또 오고 싶다', '역시 김봉미’라는 소리를 듣는 지휘자가 되고 싶고 그런 공연을 만들고 싶어요."
그의 최종적인 비전은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이 아닌 동남아시아 클래식계에 진출하는 것이다.
"한국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지 50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그 짧은 기간 동안 우리나라 클래식계는 놀라울만큼 발전을 거듭했죠.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클래식의 본 고장인 유럽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죠.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이제 한국도 충분한 실력을 갖췄으니 클래식 불모지에 클래식을 전파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기회가 있으면 동남아시아에 진출해 50년 전 국내에 클래식이 전파되던 때처럼 음악의 힘을 그 곳에 전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세계인들이 모두 클래식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뜨레 아미치와 함께하는 대한민국 경제 희망콘서트'는 오는 28일 7시 30분부터 서울시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개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