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합성수지-세탁기' 등 무역장벽 산업 전 분야로 확산중자동차, 철강, 농산물 등 '전전긍긍'… "정부-산업계 묘수 없어 고심"
  • ▲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FTA 폐기 발언으로 양국 경제협력과 안보에 큰 파장이 예고되고 있다. ⓒ 뉴시스
    ▲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FTA 폐기 발언으로 양국 경제협력과 안보에 큰 파장이 예고되고 있다. ⓒ 뉴시스

사드 배치 보복으로 중국에서 홍역을 치른 국내 산업계가 이번에는 미국 시장에서 대형 악재를 만났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강도 높게 통상 압박 수위를 높이며 각종 수입 규제 조치 강화에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묘수를 찾기 어려운 우리 정부와 산업계는 미국 요청에 따라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 절차에 들어가기로 뜻을 모았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 4일(현지시간) 한미FTA 개정협상에 착수하기로 사실상 합의했다.

'당당한 대응'과 'FTA 효과 분석부터'를 외치던 우리 정부는 개정협상 절차에 들어가기로 하며 한 발 물러선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FTA 폐기' 거론 등 거친 협상 전략이 한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는 평가다.

이번 합의로 한미 양국은 각각 국내법에 따라 협상 개시를 위한 국내 절차에 착수할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수출한 세탁기로 인해 자국산업이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판정했다. 지난달 22일 한국산 태양광 패널에 이은 두 번째 산업피해 판정이다.

ITC가 올해 말 트럼프 대통령에게 구체적인 조치를 건의하면 이르면 내년 초 세이프가드 발동 여부가 정해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제조업 부활과 보호무역 기조를 일찌감치 밝힌 만큼 세이프가드를 발동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연간 1조 원이 넘는 삼성과 LG 세탁기의 미국 수출이 큰 타격을 받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만약 내년 초 태양광 패널과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 구제조치를 받아들일 경우, 지난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한국산 등 수입 철강제품에 8~30% 관세를 부과한 지 16년 만에 세이프가드가 부활하는 셈이다.

이 밖에도 미국은 산업 전 분야에 걸쳐 한국에 대한 각종 수입 규제 조치를 동원하고 있다.

ITC는 지난달 26일 한국 등 5개 국가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페트(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수지에 대한 반덤핑 조사 예비단계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세계 각국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새롭게 착수한 수입 규제 24건 가운데 미국이 8건으로 가장 많다.

그간 한국산 철강제품에 주로 반덤핑 관세를 부과한 미국은 최근 화학, 섬유, 기계 등 여러 분야로 무역 장벽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 6월 반덤핑 조사를 착수한 '원추(圓錐) 롤러 베어링', 저융점 폴리에스테르 단섬유, 합성 단섬유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무역확장법 232조'를 철강 수입에 적용할 수 있는지 조사하라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한 바 있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정부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수입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미국의 232조 조치가 이뤄지면 수일 내에 보복조치를 취하겠다는 EU의 공언까지 나오면서 우리 철강업계의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산업계와 농업계에도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우선 한미FTA 개정협상과 관련해 자동차와 철강 업종이 전전긍긍하는 모양새다. 미국이 무역적자 주범으로 지목해왔던 만큼 관세와 상계관세부과 등으로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FTA 체결 이전으로의 교역 조건 복원은 국내 자동차 업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개정협상 시나리오다.

미국은 FTA로 한국 자동차 관세(2.5%)를 2012년 협정 발효 후 2015년까지 4년간 유지하다가 2016년 폐지한 바 있다.

따라서 현재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자동차는 무관세다. 일본·유럽산 자동차(2.5% 관세율)보다 관세 측면에서 이점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FTA 개정협상 과정에서 관세가 부활시 미국 수출용 한국차의 가격경쟁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2004년부터 미국에 무관세로 수출되는 철강 분야 역시 전반적인 통상환경이 악화할 것으로 우려하는 분위기다.

이번 한미FTA 개정협상을 계기로 미국이 한국산 철강에 대한 반덤핑·상계관세를 엄격하게 부과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농업 분야 역시 개정협상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 정부는 한미FTA 체결 당시 쌀을 비롯한 민감 품목 16개를 양허 대상에서 제외했다. 쇠고기는 협상 체결 당시 15년에 걸쳐 관세를 철폐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 여부까지 개정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경우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문제는 미국의 통상 압박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단이 마땅치 않은 점이다.

북한 핵실험 등 동북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미국과 협력이 필요하다보니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FTA 갈등으로 한미 공조가 약해질 경우 한국 정부에 상당히 부담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일단 FTA 개정협상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면 미국은 자동차와 농산물 시장 개방을 적극적으로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로서는 한국이 적자를 보는 서비스교역 개선에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서비스 무역흑자는 한미FTA 발효로 지식재산권, 법률, 금융, 여행 시장 등이 개방되면서 2011년 69억 달러에서 2016년 101억 달러로 증가했다.

'투자자-국가소송제(ISD)'를 손질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ISD는 우리나라 정부의 법·제도로 손해를 본 미국 투자자가 국제중재기구에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어 사법주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됐다.

다만, 이 같은 협상을 진행해도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게 많다는 것이 흠이다.

통상 전문가는 "미국은 여러 분야의 시장을 많이 개방한 상태라 우리가 요구할 카드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며 "양보한 만큼 얻어내면서 이익의 균형을 맞추는 게 협상인데 한미FTA 개정의 경우 우리가 얻을 이익이 미국보다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세탁기 세이프가드 조치와 관련해서는 오는 11일 산업부와 전자업계 관계자들이 대책회의를 열 계획이다.

이번 대책회의에서는 오는 19일 미국에서 열릴 구제조치 공청회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 아울러 제소업체인 미국 월풀의 주장을 반박할 논리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