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으면 명단을 공개하고 신용 제재에 나서겠다고 엄포를 놓던 정부. 차라리 범법자가 되겠다며 최저임금 불복종을 선언한 영세 소상공인들. 문재인 정부 들어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부른 현재의 자화상이다. 최저임금이 올해 16.4%에 이어 내년도 10.9% 인상이 결정됐다. 불황에, 인건비 부담에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은 아우성이다. 경제 논리 대신 정치 논리로 풀어버린 최저임금의 현주소와 문제점을 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편집자 註>
고용노동부가 지난 3일 내년도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10.9% 오른 8350원으로 확정, 고시했다. 국제통화기금(IMF)마저 한국의 최저임금 인상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속도 조절을 주문했던 상황에서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제는 시장의 지급능력 등을 함께 고려해 경제 논리로 풀어야 할 최저임금을 대통령 공약 달성을 위해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내년 이후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사회적 불안감이 팽배하다는 점이다.
기획재정부 제1차관 출신인 자유한국당 추경호 의원은 3일 "경제 전문가들이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부작용을 지적하면서 이의를 제기하고 재심의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우려한 대로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내년도 최저임금을 확정, 고시했다"며 "정치 논리가 경제 논리를 압도한 결과"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추 의원은 "현 정부의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대선공약에 사로잡힌 과도한 집착이 낳은 고통일 뿐 어떤 객관적, 합리적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다"며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대표되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폐기하고 서민경제 살리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각에선 정부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으로 최저임금을 정권 연장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표현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최저임금이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데 그치지 않고 고용, 투자 등 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다고 우려한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생산단가에 반영돼 물가가 오르고 실질 소비 감소로 이어지면 기업의 투자 위축, 고용 감소 등 악순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속도 조절의 필요성과 함께 최저임금을 도입한 선진국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나이·업종·지역별로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 결정 방식 바꿔야… "중립적 공익위원 선출이 관건"
최저임금 인상이 정치 논리에 흔들리면서 전문가들은 결정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속도 조절이 필요한 시점에서 지금의 결정 구조로는 내년에도 두 자릿수 인상률이 적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다.
올해는 최저임금제도가 도입된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 논란이 뜨거웠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싸고 소상공업계가 불복종 선언에 나섰고 정치권에서도 재심의 요구가 제기됐다. 때문에 사용자단체의 이의제기에 노동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됐다. 그러나 정부는 결국 재심의를 거부했다. 김영주 노동부 장관은 "심의·의결 과정에 하자가 없고 최저임금위에 부여된 적법한 권한 내에서 독립성·중립성을 견지하면서 이뤄진 결정으로 판단했다"고 고시 이유를 밝혔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다. 정부나 최저임금위 공익위원이 자신의 결정을 번복해 스스로 결정의 정당성을 훼손할 가능성은 작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은 일단 내년도 최저임금이 결정됐다. 이제 내년이 되면 후년 최저임금이 논란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조금 더 전문성을 갖추고 중립적인 공익위원을 중심으로 최저임금이 업종이나 지역의 물가수준을 반영해 어느 정도가 적정한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분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저임금은 시장에서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지급 능력 등을 고려해 판단한다는 게 애초 취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의 선거 공약과 연계해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구도로 변질했다. 최대한 중립적인 공익위원을 선출하는 게 정치적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박 교수는 주장했다.
박 교수는 "지금의 최저임금 결정 구조로는 정치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정치적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게 전제돼야 한다"며 "정치적 중립을 찾아가는 게 정말 어려운데, 그럼에도 정당들이 내놓은 여러 입법안 중 여야 의원이 공익위원을 추천하고 국회의장이 위원장을 추천하는 게 가장 나아 보인다"고 했다. 당적이 없는 국회의장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함으로써 최저임금위를 최대한 중립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설명이다.
올해 최저임금위 공익위원이 물갈이되면서 친노동계, 진보성향 인사로 편중됐다는 지적이 나왔고, '더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 과정만 봐도 이런 성향이 감지된다. 지난달 경영계 불참 속에 '반쪽심의'로 이뤄진 최저임금 표결에서 노동계는 올해보다 15.3% 오른 시급 8680원, 공익위원은 10.9% 인상한 8350원을 각각 제시했다. 표결 결과는 각각 6표와 8표가 나왔다. 이날 전원회의에는 근로자위원 5, 공익위원 9명만 참석했다. 공익위원 중 1명이 자신들이 내놓은 인상안 대신 노동계 인상안에 표를 던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정부가 위촉하는 전문가 등으로 구성되는 공익위원은 정부 의중을 반영한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앞서 최저임금위는 경제수장인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의 '속도 조절' 발언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최저임금위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올해 16.4%보다 5.5%포인트 낮게 결정된 배경으로 공익위원이 정부의 속도 조절론에 부응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 논리가 아닌 정부 정책대로 움직이는 현재의 최저임금 결정 방식은 위법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는 "최저임금을 대통령이 공약하는 것 자체가 최저임금법 위반이다. 최저임금위가 여러 요소를 고려해 결정하게 돼 있는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정부가 관여했다"며 "국가 경제 전체를 생각해 중립적인 입장에서 중심을 잡아줘야 할 공익위원이 친노동계 인사들로 채워져 있다. 최저임금의 기본 취지를 정치권에서 계속 위반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저임금 인상에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계층은 영세 사업장에 고용된 근로자나 자영업자다. 특히 자영업자는 한번 실패해도 또다시 자영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여건이 대한민국 자영업자의 현주소다. 따라서 이들을 구제하는 방안으로, 노동시장을 개혁해 대기업에서 흡수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 교수는 "선진국에선 중견기업과 대기업 고용 비중이 40~60%에 달해 고용이 줄지 않는다"며 "한국은 9인 미만 영세업자가 60%에 달하는 만큼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노동시장 개혁을 통해 대기업에서 고용을 흡수해줄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 번 올린 최저임금을 다시 내리기는 어렵기에 사회적 충격을 완화하는 방안 마련도 시급하다는 견해다.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연구·개발(R&D) 지원과 부가가치세 인하, 영세 사업자의 소득세 인하 등이 해법으로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