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의 오발탄 … 스모킹 건 당겨투기자본과 손잡으며 거버넌스 개선 … '자기모순''한국형 기업가 정신' 최대 위기재계 vs 사모펀드 대리전 양상 비화"사모펀드 본질은 행동주의 … 경계해야"
  • ▲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뉴데일리
    ▲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뉴데일리
    2024년 하반기 재계의 화두는 ‘한국형 기업가 정신의 위기’다. 창업주가 창의와 도전정신으로 일으킨 기업을 후대 경영자가 이어받아 발전시켜 온 전통이 깨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진원지는 고려아연이다.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고려아연의 산업자본과 영풍‧MBK파트너스의 금융자본간 싸움의 결과에 따라 한국형 기업가 정신의 지속 여부가 판가름 날 전망이다. 고려아연 사태의 본질과 그 영향에 대해 4회에 걸쳐 짚어보고자 한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을 지켜보는 재계 전반에서 우려의 시각이 증폭하고 있다. ‘오너 총수 체제’가 주를 이루는 대한민국 산업 생태계를 뒤엎을 상징적인 사건으로 판단, 경제산업계는 물론 정치사회권에서도 고려아연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고려아연 사태 초반 만해도 재계는 고려아연의 경영권 싸움을 단순한 분쟁으로 여겼다. 장씨 일가와 최씨 일가가 함께 설립해 70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아름다운 동업’이 깨어질 위기에 처한 것을 안타깝게 보면서 두 가문이 화해에 이르길 기원해 주는 정도였다.

    재계 본산인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를 필두로 한 경제단체는 물론 영풍과 고려아연이 회원으로 있는 한국비철금속협회 등 업종별 단체도 언급을 피한 채 쉬쉬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초유의 금융자본 개입…‘있어선 안 될 분쟁’ 돼

    그러나 지난 9월 영풍이 사모펀드(PEF) 운용사 MBK파트너스를 끌어들이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간의 경영권 분쟁들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진 사례는 빈번했으나, 영풍과 같이 반세기 넘게 유지한 동업 경영을 끝내면서 ‘돈 보따리를 짊어진’ 외부인을 끌어들인 일은 초유의 사태였기 때문이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MBK와 손잡은 영풍을 ‘잘못된 만남’이라면서 장형진 고문의 그릇된 아집에서 비롯된 ‘패착’이라고 비판했다. 또 고려아연 사태는 비금융기업과 금융기업 오너 간 권력 다툼으로 봐야하며, 결과에 따라 재계 오너 중심 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오너 총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전문경영인과 직원들이 풀어내기엔 한계가 있다”며 “대부분 당사자인 오너가 화해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막장에 가까운 싸움이 벌어져도 타협의 여지는 열어 놓았다. 두 사람을 한 테이블에 마주하도록 하는 중재자도 그래서 존재했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LG와 SK가 사활을 걸고 맞붙었던 이차전지 배터리 분쟁을 비롯해 1990년대 말 발발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 때 정부 압박으로 추진했던 대기업 사업 빅딜(Big Deal), 더 앞서 제2이동통신 사업자 재선정 등 기업의 미래가 걸린 첨예한 사안들은 그룹 총수들이 모여 이해당사자의 주장을 중재, 합리적인 합의안을 도출하며 해결돼왔다.

    이 관계자는 “MBK가 들어오기 전만 해도 다른 대기업 총수들은 오너일가 간 ‘있을 법한 갈등’으로 봤고, 필요하다면 중재자 역할을 맡겠다는 이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며 “그러나 MBK 개입으로 고려아연 사태는 화해 가능성을 잃었다. 장 고문이 최윤범 회장에 대한 분노로 경영 주도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금융자본과 협력하면서 ‘있어선 안 될 분쟁’이 됐다”고 말했다.
  • ▲ (왼쪽부터)장형진 영풍 고문,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 ⓒ각사
    ▲ (왼쪽부터)장형진 영풍 고문,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 ⓒ각사
    “김병주 회장, 기업에 대한 시각 달라져야”

    MBK도 김병주 회장을 총수로 둔 오너 기업이다. MBK는 다수의 경영부실기업을 인수‧합병(M&A)한 후, 내실 있는 기업으로 키워 비싼 값에 팔아 명성을 얻었고 아시아 최대의 사모펀드 운용사로 성장했다.

    김 회장은 M&A의 범위를 정상적으로 수익을 실현 중인 우량기업으로 확장했다. 내세운 명분이 거버넌스(지배구조) 개선이다. 그러면서 기업 경영권을 확보해 완전히 소유하는 바이아웃 투자를 키우겠다고 공언했다.

    MBK는 약탈적이고 적대적 M&A란 도덕적인 지적을 감수하면서까지 ‘합법적인’ 방법을 총동원해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주총에서 승리하기 위해 공개매수와 장내매수를 통해 의결권 지분율을 최대한 늘리는 한편 고려아연의 투자 활동에 의문을 제기하며 여론몰이에도 공세를 퍼붓고 있다.

    재계는 표면적으로 고려아연 사태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속내는 고려아연이 MBK에 넘어가면 PEF들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게 돼 언젠가는 자사도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장 고문과 영풍에 대한 불만도 커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경협도 재계의 주요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목소리를 내왔으나 고려아연 분쟁에 대해서는 언급을 되도록 자제하고 있다. 최근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서는 지배구조 규제 등 행동주의 캠페인 활성화 여건 조성을 지양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으나, 비회원사인 고려아연에 좋은 내용이라는 영풍 측의 강력한 민원을 받은 뒤 더욱 조심하는 분위기다.

    오너인 김 회장의 기업에 대한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김 회장은 포스코 설립자인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의 사위다. 박 명예회장은 대일청구권자금으로 포스코를 설립해 제철보국(製鐵保國)의 신념으로 회사를 키워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박 명예회장은 도덕적인 부정과 부패를 절대 부정한 청렴한 기업가”라며 “그가(박 명예회장이) 살아 있었다면 기업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는 사위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토종 PEF인 MBK는 서구의 PEF와 차별화한 투자전략을 구사할 것을 주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말했다.

    오너 3~4세간 유대, 갈등 국면서 손발 묶여

    최윤범 회장은 2022년 12월 고려아연 회장에 오른 지 2년에 만에 금융자본에 맞서는 산업자본의 선봉장이 됐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내부에서는 가족과 친인척, 고려아연 임직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최 회장은 ‘트로이카 드라이브’를 통해 현대차그룹, LG, 한화, 한국앤컴퍼니 등 재계 주요 그룹과도 든든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트로이카 드라이브는 고려아연이 비철금속 세계 1위를 넘어 글로벌 환경 소재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이차전지소재, 신재생에너지 및 그린수소, 자원재활용 등의 신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 기업 오너 3~4세과 최 회장은 선대 경영자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공식‧비공식 모임과 만남을 통해 끈끈한 인연을 쌓아가고 있다. 최 회장은 활발한 대외활동으로 은둔의 기업으로 불리던 고려아연의 위상도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비철금속과 함께 배터리 금속 등 이차전지 신사업이 구체화하며 사업 외연도 넓어지고 있다.

    하지만 영풍‧MBK 금융자본의 공세로 고려아연 입지가 위태로워지고 있다. 고려아연이 전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76.2%(895명)가 적대적 M&A가 ‘조직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 답하는 등 심각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비철금속 업계 관계자는 “스스로 경영에서 손 떼고 지분도 매각해 ‘투자자’에 불과한 장 고문과 비금융기업 경영 노하우가 부족한 금융인 김 회장이 국가기간산업의 중요한 축을 구성하는 고려아연 경영권을 차지하도록 두고만 봐야 하느냐”며 “우랑 기업 고려아연을 거리낌 없이 금융자본인 MBK에게 넘기려고 하는 장 고문에 대해 두고두고 뒷말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