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노동계 "건강권 보장" … 새벽배송 제한 입법 검토현장에선 반발 "건강권보다 생존권 먼저… 일자리 뺏지마"건강권 명분 뒤에 민노총 교섭력 확대? … 정치적 해석도현실 외면한 추진 비판도 … 교통체증·근로시간 증가 우려"건강권이 본질이라면 기다릴 필요도"… 로봇이 근로 대체
  • ▲ 새벽 택배 분류 작업 ⓒ연합뉴스
    ▲ 새벽 택배 분류 작업 ⓒ연합뉴스
    정부와 정치권이 '새벽배송 제한' 입법을 검토하면서 물류 현장과 소비자 사이에서 반발이 커지고 있다. 노동계는 택배기사의 건강권을 이유로 심야 배송 금지를 주장하지만, 업계와 소비자들은 "생존권이 걸린 문제"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5일 노동계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은 새벽 0~5시 배송을 제한하는 입법을 검토 중이다. 앞서 지난달 22일에는 민주당 주도로 노동계·택배업계·화주단체·소비자단체가 참여한 사회적 대화기구가 출범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노총 산하 택배노조는 "심야 배송은 노동자에게 가장 위험한 시간대"라며 "다만 자정까지의 배송과 오전 5시 이후 배송은 계속된다"고 말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혔고, 민주당은 민주노총에서 제기하는 새벽배송으로 인한 노동자 과로사 문제에 공감하며 뜻을 같이 하고 있다. 이용우 민주당 의원은 "야간 노동시간 총량을 규제하거나 연속 근무 일수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지혜를 모을 수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반발이 거세다. 배송 기사, 전세버스 운전자, 중소상공인, 온라인 쇼핑업계 모두 생존권이 달린 만큼 '새벽배송 사수'로 맞서고 있다. 새벽배송은 쿠팡, 컬리 등 플랫폼을 통해 약 2000만명의 이용자가 15조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며 소상공인 생계와 소비자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다. 

    쿠팡파트너스연합회(CPA)는 "심야 배송 중단은 수천 명의 해고와 다름없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CPA가 자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새벽배송 기사 2405명 가운데 93%가 '심야 배송 제한'에 반대했고, 주야간 교대제 도입에도 84%가 반대했다. 

    전국전세버스생존권사수연합회도 "야간 배송이 멈추면 우리 업계도 함께 멈춘다"며 새벽배송 논의 자체에 대한 철회를 촉구했다. 현재 쿠팡 물류센터에서 야간 근무 인력을 실어 나르는 전세버스는 약 1000여 대로 추정된다. 

    소비자단체 역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는 "새벽배송은 이미 국민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필수 서비스"라며 "단순한 편의를 넘어 국가 물류 시스템의 핵심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이 발표한 '2024년 소비자시장평가지표'에서 새벽배송은 40개 주요 서비스 중 1위를 기록했다.

    일각에서는 민주노총이 교섭력을 확대하기 위해 새벽배송 제한을 주장한다는 의심도 제기된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건강을 염려해서라기보다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저의가 숨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새벽배송은 쿠팡, 마켓컬리 등 신규 플랫폼 중심으로 운영돼 전통 노조의 영향력이 미치기 어렵다.

    새벽배송이 제한될 경우 발생하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다. 현재 민노총과 당정이 고려하는대로 0~5시 심야노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면 아침 6~7시로 배달을 늦출수밖에 없는데 직장인들의 출근시간과 겹쳐 교통 체증에 따른 배송 시간 지체 등 근로시간만 늘게 된다. 

    한 택배업계 종사자는 "기존에는 차량 정체가 없는 새벽시간대에 배송을 해서 일이 빠르게 끝났는데, 새벽배송이 중단되면 교통체증에 따라 도로에서 버리는 시간만 늘어날 것"이라며 "노동자들의 생존이 달린 문제를 건강권이란 잣대 하나만 들이밀어서 결정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민주노총의 주장대로 택배기사의 '건강권'이 진정한 본질이라면 사회가 조금 더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물류 산업은 이미 자동화와 무인화 기술이 빠르게 도입되고 있으며, 일부 대형 플랫폼은 AI 기반 물류 시스템과 로봇 배송, 무인 차량 운송 등을 실험 중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이러한 기술 변화는 장기적으로 노동 강도를 줄이고 심야 배송의 위험성을 완화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며 "다만 자동화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대체할 가능성도 있으니 정책 결정 이전에 활발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