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실질 가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 기록고환율에 원자재 가격 급등·해외 공장 투자비 증가산업연구원, 美 관세 여파에 내년 수출 역성장 전망 IMF "韓, 무역·지정학적 리스크 심화 등 하방위험 상존"
  • ▲ 평택항에 쌓인 수출입 컨테이너.ⓒ연합뉴스
    ▲ 평택항에 쌓인 수출입 컨테이너.ⓒ연합뉴스
    원화 가치가 과거 경제 위기 당시 수준까지 떨어지며 한국 경제 전반을 압박하고 있다. 과거에는 환율 상승이 수출기업의 매출 확대 효과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글로벌 경기 침체와 원자재·중간재 가격 상승 부담이 겹치면서 오히려 기업들의 짐이 되고 있다.

    25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475.2원에 개장하며 3거래일 연속 1470원대 시가를 기록했다.  

    실제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올해 10월 말 기준 89.09(2020년=100)로, 한 달 전보다 1.44포인트(P) 하락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 때인 2009년 8월 말(88.88) 이후 16년 2개월 만의 최저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8년 11월 말(86.63)과 비교해도 크게 높지 않은 수준이다. 

    원화 가치 하락 추세가 고착화되자 외환당국과 국민연금이 처음으로 협의체를 만들어 환율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 한국은행, 국민연금이 참여하는 '외환시장 4자 협의체'가 구성된 것은 사실상 처음으로 그만큼 최근 환율 상황을 둘러싼 위기감이 적지 않다는 방증이다. 

    시장에서는 환율이 급등할 때 국민연금이 환헤지 비중을 확대하거나 한은과 국민연금의 외화스와프 계약 연장 등의 방안이 다뤄질 것으로 내다본다. 

    이같은 이례적인 고환율은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을 끌어내리고 있다. 반도체와 자동차 등 주력 수출 업종도 고환율의 수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통상 환율이 오르면 한국산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고 환차익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현 상황에선 호재로만 보기 어렵다. 

    우리 수출 구조가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한 뒤 다시 수출하는 형태인 만큼 고환율이 장기화될수록 수출 기업의 비용 부담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원자재 수입 가격은 환율 상승분이 즉각 반영되지만 완제품 수출은 시장 여건과 계약구조상 곧바로 조정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가격 경쟁력 개선 효과보다 비용 압박이 더 빠르고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주요 제조업 전반에서 원자재·중간재 수입가격 상승과 해외 공장 투자비 증가가 동시에 나타나면서 '환율이 올라가도 남는 게 없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더욱이 글로벌 경기 둔화로 전반적 수요가 감소하면서 기업들의 부담이 가중되는 형국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고환율로 인한 원가 상승이 마진 축소로 직결되고 불확실성 확대로 투자까지 위축되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며 "고환율이 수출 증가 효과를 일부 가져올 수 있지만 물가 급등과 글로벌 경기 둔화로 총수요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는 순효과가 크지 않다"고 했다. 

    정부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 등 주요 수출 대기업에 정부의 환율 안정을 위한 외환수급 개선방안 논의에 적극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기업들이 해외 법인에 보유한 달러나 수출 대금을 원화로 환전해 달라는 우회적인 요청으로 해석됐다. 

    다만 기업들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트럼프 정부가 관세를 무기로 현지 투자 확대를 압박하고 있고, 수출 호조에도 원화 약세 흐름이 가팔라 원화로 환전하지 않고 그대로 보유하거나 해외 현지법인에 재투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이에 기업이 수출로 벌어들인 이익을 국내로 환류하거나 투자해 생산성 개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제혜택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경원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무역흑자가 원화 강세로 이어지는 공식이 붕괴된 것은 기업 해외투자 확대에 따른 수출 실적과 달러 공급 불일치 때문"이라며 "한미 관세협상 3500억달러 대미 투자와 민간기업 생산기지 이전까지 감안하면 실물경기 달러 실수요는 빠르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2022년 환율 1400원을 경험한 국내기업이 원화 약세에 대응해 외화 보유비중을 확대하면서 수출 경기 회복에도 원화 환전 수요가 감소하고 있다"며 "미국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해외 현지법인에서 재투자 형태로 사용하고, 부족한 달러는 지분투자를 위해 외환시장에서 구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내수 부진 장기화 속 그나마 수출이 우리 경제의 숨통을 틔우고 있지만, 정작 내년에는 수출이 역성장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고환율 부담에 글로벌 경기 둔화까지 겹치면서 우리 기업들이 감당해야 할 충격이 예상보다 클 수 있다는 우려가 번진다.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2026년 경제·산업 전망'에 따르면 내년 한국 수출이 올해보다 0.5% 줄어드는 역성장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다. 인공지능(AI) 열풍으로 반도체 산업은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기기 어려울 전망인데다, 자동차·철강·석유화학 업종까지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 압박의 직격탄을 받게되면서 수출 환경은 더욱 거칠어질 것이란 우려다.

    산업별로는 이차전지, 정유 수출은 10% 이상 감소하고 미국발 50% 품목 관세와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는 철강은 5~10% 가량 수출이 역성장할 전망이다. 자동차, 조선, 일반기계, 석유화학 등의 수출 실적도 0~5% 감소할 것이란 관측이다.

    권남훈 산업연구원장은 "대외적으로 미·중 무역 갈등, 미국의 품목 관세 인상 및 확대 가능성 등이 내년에도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라며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의존성이 많이 강화된 데 반해  다른 주력 산업은 상당한 도전을 받고 있어, 내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봐도 우려요인"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높아진 대외 불확실성 대응을 위한 수출 기반 강화를 당부했다. IMF는 '2025년 한국 연례협의 보고서'를 통해 무역 및 지정학적 리스크 심화 가능성, 인공지능(AI) 수요 둔화에 따른 반도체 부진 등을 한국 경제 하방 위험으로 꼽았다. 

    IMF는 "수출 측면에서는 한국이 첨단제조업 분야에 높은 비교 우위를 가지고 있으나 특정 국가·품목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며 "AI 도입과 연구개발 확대 등을 통해 첨단 제조업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서비스 수출 확대, 역내 교역 강화 등 수출 기반을 다변화해야 한다"고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