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의, 규제합리화 과제 139건 정부 건의고압가스 저장소 출입문 방향 놓고 규정 충돌ESS 입지·상비약 목록 등 민생·성장 규제 손질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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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상의가 기업 현장과 민생 분야 규제합리화 과제 139건을 정부에 제출했다.

    고압가스 저장소 출입문 방향처럼 부처·규정 간 기준이 충돌해 기업 비용과 현장 혼선을 키우는 사례가 대표적으로 제시됐다.

    생산 중단된 어린이 해열제가 편의점 상비약 목록에 남아 있고, 에너지저장장치(ESS) 입지 기준도 불명확해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 현장에서 “어느 규정을 따라야 하느냐”는 하소연이 커지고 있다. 같은 시설을 두고 한 규정은 문을 안쪽으로 당기라고 하고, 다른 규정은 바깥쪽으로 밀라고 요구하는 식이다. 안전을 위한 규제가 오히려 현장 혼선을 키우고, 기업에는 추가 비용 부담으로 돌아가는 구조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9일 기업별 의견을 취합해 ‘기업현장의 규제합리화 과제’ 139건을 민관합동 규제합리화추진단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건의서에는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현장 규제와 국민 생활 불편을 초래하는 민생 규제, AI·재생에너지 등 미래 산업 성장을 위해 정비가 필요한 제도 개선 과제가 담겼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고압가스 저장소 출입문이다. 고압가스 안전관리 관련 규정은 가스 누출 확산을 막기 위해 저장소 출입문을 안쪽으로 당겨 여는 구조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산업안전 관리 관련 규정은 사고 발생 시 작업자가 신속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문을 바깥쪽으로 밀어 여는 구조를 요구한다.

    결국 같은 문을 두고 한쪽은 ‘당기는 문’, 다른 한쪽은 ‘미는 문’을 요구하는 셈이다. 고압가스를 취급하는 한 기업은 고압가스 규정에 맞춰 당기는 문을 설치했지만, 산업안전 점검에서 지적을 받아 50여개 문을 교체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호소했다.

    대한상의는 이처럼 목적은 모두 안전에 있지만 세부 기준이 충돌할 경우 현장은 어느 쪽을 따라도 위반 소지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설비 교체 비용뿐 아니라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까지 불분명해질 수밖에 없다.

    산업단지 창고 규제도 현장과 맞지 않는 사례로 제시됐다. 산업단지 산업시설구역에는 원칙적으로 제조시설과 그 부대시설이 입주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제조시설 없이 창고만 단독으로 설치하거나 별도 필지에 창고를 임차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대구의 한 산업단지 입주기업은 주문 증가로 제품 보관 공간이 부족해지자 단지 내 유휴공장을 창고로 임차하려 했지만, 제조시설도 함께 확대해야 한다는 해석에 막혔다. 결국 산업단지 밖 물류시설을 이용해야 했다.

    기업들은 제조업 기반을 유지하자는 규제 취지 자체는 이해하지만, 이미 제조시설을 운영 중인 기업이 자사 완제품을 보관하기 위해 추가 창고를 쓰는 것까지 막는 것은 과도하다고 보고 있다. 성수기나 수출 물량 급증기에 한시적으로 창고 임차를 허용하거나, 장기적으로 산업단지 내 공동 물류창고를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국민 생활과 직결된 민생 규제도 건의서에 포함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목록이다.

    정부는 약국이 문을 닫는 심야시간과 공휴일에도 소비자가 24시간 편의점에서 일부 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안전상비의약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13개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가운데 어린이용 타이레놀 80mg과 타이레놀 160mg은 2022년부터 생산이 중단됐는데도 아직 목록에 남아 있다.

    현장에서는 목록에는 있지만 실제로는 구하기 어려운 품목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제도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의 한 부모는 "생산이 중단된 품목은 신속히 대체 의약품으로 재선정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주주총회 소집통지 전자화도 규제합리화 과제로 제시됐다. 현행 상법상 주주총회 소집통지는 서면 통지가 원칙이고, 주주가 사전에 동의한 경우에만 전자고지가 가능하다. 하지만 사전 동의를 받는 구체적 절차가 명확하지 않고, 개별 주주의 개인정보 제공 동의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아 실제로는 우편 발송이 대부분이다.

    기업들은 국내 상장사가 매년 발송하는 주주총회 종이우편이 1억장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주주명부에 이메일 등 전자통지 수단을 기재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고, 전자통지를 원칙적으로 허용하면 기업 비용과 주주 불편을 동시에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주주총회 정보 전자고지 서비스는 2019년 규제샌드박스 승인을 받아 시범 운영된 바 있다. 대한상의는 별다른 사고가 없었던 만큼 제도 개선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미래 산업과 관련해서는 에너지저장장치, ESS 입지 기준 정비가 주요 과제로 올랐다. ESS는 배터리를 대규모로 집적해 전력을 저장하는 설비인 만큼 안전 관리가 중요하다. 그러나 주변 시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하는지에 대한 중앙정부 차원의 명확한 기준은 아직 부족하다는 게 기업들의 지적이다.

    재생에너지 보급이 확대되고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늘어나면 ESS 설치 수요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격거리 기준이 불명확하면 지자체마다 판단이 달라지고, 기업은 어디에 설비를 설치할 수 있는지 예측하기 어렵다.

    과거 태양광 발전시설 이격거리가 지자체별로 100m에서 1km까지 제각각이었다가 최근 법 개정으로 정비된 것처럼, ESS도 보급이 본격화되기 전에 공통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기업들은 지자체의 자율 권한은 유지하되 중앙정부가 참고 기준을 제시해 입지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국가전략기술 분야에 전문연구요원 배정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도 포함됐다. 전문연구요원 제도는 이공계 인력이 군 복무 대신 연구기관에서 복무하도록 하는 제도다. 그동안 중소기업 중심으로 배정돼 왔지만, 반도체·AI·배터리 등 국가전략기술 분야에서는 대기업 연구소의 역할도 큰 만큼 제도 운용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미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이공계 박사 인력은 2010년 약 9000명에서 2021년 1만8000명으로 늘었다. 10여년 사이 두 배 수준으로 증가한 것이다. 기업들은 석박사급 핵심 인재의 해외 유출을 막고 전략기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글로벌 수준의 연구 역량을 갖춘 대기업 부설연구소에도 전문연구요원 배정을 확대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 밖에도 물류센터용 고중량 이동로봇이 화물용 승강기를 이용할 때 일반 승강기 기준이 적용되는 문제, 경기도 섬유·염색업 중심 산업단지에 세탁업종 입주를 허용하는 방안 등이 개선 과제로 제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