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일 태국 파타야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3 정상회의'가 반정부시위로 인해 무산되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했다. 또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일정도 무기한 연기됐으며 태국을 제외한 아시아 15개국 정상은 이날 오후에 전원 태국을 떠났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정을 앞당겨 12일 새벽 조기 귀국했다. 청와대는 "태국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비상상황을 선포했고, 각국 정상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되 최대한 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면서 "조기 귀국이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날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의 한중 정상 면담, 일본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에 이어 한중일 3개국 정상회의를 갖고 글로벌 경제위기 극복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도발에 따른 후속 대책 등 현안을 논의하는 등 악조건 속에서도 순방 성과를 극대화시키기위해 노력했다. 이날 긴박했던 하루 일정을 되짚어본다.
태국 파타야에서 11일 개최될 예정이었던 '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3 정상회의'가 반정부시위로 인해 무산됐다. 붉은 색 티셔츠와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가 '비치로드(Beach Road)'변에 게양된 참가국 국기를 지나 회의장인 로열 클리프 호텔로 이동하고 있다. ⓒ 뉴데일리 이길호 [=태국 파타야] 오전 9시 반경(이하 태국 현지시각).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를 지지하는 단체인 '독재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이 이끄는 시위대가 정상회의장인 로열 클리프 호텔을 봉쇄하면서 이 대통령의 첫 일정인 한.아세안 정상회의가 차질을 빚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이때부터 수행단과 순방 기자단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시위대는 이 대통령과 원 총리의 숙소인 두싯타니 호텔 주변에서도 시위를 벌여 이 대통령과 원 총리는 호텔에서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개최국인 태국 정부는 육로 대신 보트를 이용해 이 대통령과 원 총리를 회의장소로 안내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경호상의 문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결국 한.아세안 정상회의는 취소됐다.
이 대통령과 수행단은 마지막까지 개최 가능성을 열어놓고 회의 준비에 임하면서도 아세안+3 정상회의 전체 일정 변경에도 대비했다. 이 대통령은 당초 한·아세안 정상회의, 아세안+3 정상업무오찬, 아세안+3 정상회의, 한일 정상회담, 한·호주 정상회담, 한·미얀마 정상회담 등을 가질 예정이었다.
오전 10시를 넘긴 시간, 로열 클리프 호텔을 향하고 있는 붉은 색 티셔츠를 입은 UDD 시위대가 기자에 목격됐다. 택시와 트럭, 도보로 나뉘어 회의장으로 이동하던 시위대 일부는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몇몇은 이동중 벽돌과 빈 유리병을 준비하는 모습도 보였다. 상황이 격화될 조짐이 보인다는 청와대측 설명도 전해졌다.
시위대를 저지해야할 경찰은 무기력해보였다. 한발치 떨어져 구경할 뿐 회의장 진입을 막을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현지인은 "탁신 전 총리가 경찰 출신이란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시위참가자 대부분은 500바트(원화로 약 2만원)을 받고 동원된 인원이라는 설도 퍼졌다.
같은 시각 로열 클리프 호텔 진입로에는 푸른 색 티셔츠 무리가 모여있었다. 이들은 아피싯 현 총리 지지자들이다. 이들 역시 나무몽둥이와 같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결국 UDD 시위대 1000여명은 이날 오후 1시께 로열 클리프 호텔 난입에 성공했다. 경찰 경계선을 돌파, 호텔의 유리문을 깨고 정상회의장 미디어센터로 들어간 이들은 이어 금속탐지기를 넘어뜨리고 탁자 등 기물을 파손했다. 시위대 일부는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태국 국기를 흔들면서 "아피싯은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현 아세안 의장인 그를 찾아내겠다며 회의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현장에도 경찰이 있었으나 시위대의 돌진을 저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타야 도심 곳곳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로열 클리프 호텔에서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일부 국가 정상들은 옥상을 통해 헬기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이 회의장에 있었더라면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아세안+3 정상회의 자체가 불투명해지자 한중일 3국 외교장관은 긴급히 향후 일정 조율에 나섰다. 그러나 이 역시 시위대로 회동이 어려워져 한중, 한일, 중일 양자간 전화통화를 통해 협의한 결과 오후 12시 이후 3국 양자간 회담과 3국 정상회담 일정이 구체화됐다. 시간은 오전 11시를 넘고 있었다. 태국 정부의 뒤늦은 아세안+3 정상회의 연기 발표 소식이 들려왔다.
급히 일정을 조정한 터라 수차례 회담 순서 변경을 거친 결과 12시 한중 정상 면담, 14시 5분 한일 정상회담, 15시 10분 한중일 정상회담 순으로 결정됐다. 청와대측은 회담 준비와 함께, 조기 귀국 준비에 나섰다. 점심은 한국 기자단 프레스센터에서 도시락으로 대충 해결했다.
한중일 회담이 시작된 후 귀국 시간이 정해졌다. 오후 5시 30분에서 6시 사이 태국을 출발하는 것으로 결정됨에 따라 기자단은 회담결과에 따른 기사작성과 철수준비를 병행해야했다. 기자단 숙소에서 공항까지는 약 1시간 30분 거리. 태국 '느림보'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가까스로 출발시간에 맞춰 우타파오 공항에 도착에 성공했고 오후 5시 50분, 비행기는 이륙했다. 기자단 사이에서는 태국 정부의 안이함을 두고 "이게 뭐냐"는 허탈해하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이 대통령은 돌아오는 기내에서 기자들과 만나 6월 제주도에서 개최 예정인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염두에 둔 듯 "우리가 할 일이 생긴 것"이라며 가볍게 받아 넘겼다. 이 대통령은 밝은 표정으로 기자단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오히려 기자단을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이 대통령과 기자단을 태운 아시아나 특별기가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한 것은 12일 새벽 1시(한국시각)를 지난 시각. 공항 입국 절차를 거쳐 다시 청와대에 도착하고 보니 새벽 2시를 훌쩍 넘어있었다.
다자간 정상회의가 개최국 내 시위로 무산돼 각국 정상이 서둘러 철수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태국의 국가 이미지에 큰 손상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당초 지난해 12월에도 태국 수도 방콕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같은 이유로 연기, 아세안 회의 일정을 넉달째 번복한 셈이 됐고 의장국으로서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게 됐다.
아피싯 총리는 우타파오 국제공항에 미리 나와 있다가 조기 출국하는 이 대통령에게 "머무시는 동안 큰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괜찮다. 조만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자"면서 "6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때도 다시 뵐 수 있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청와대측은 "황당하다"는 반응과 함께 이 대통령이 올초 밝힌 '신(新) 아시아 외교구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된 데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한 관계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태국 정부의 무책임한 회의 준비에 실망감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