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 수감 650일... 통 큰 투자·연구개발 '올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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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실물경제에 비상등이 켜진 지 오래다. 분기성장률은 4분기 연속 1%도 안 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최근 3년간 가계소득 증가율도 1%대에 불과하다. 국내외 경기침체에 따른 산업 생산 위축과 기업 투자 감소가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가 나름대로 경기부양책을 쓰곤 있지만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지 않는 이상 막힌 혈관을 뚫어내긴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늘린다면 경기침체라는 터널을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다.
문제는 총수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투자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기업들이 많다는 점이다. 재계 3위 그룹 SK가 대표적 예다.
지난해 1월 수감된 SK 최태원 회장의 부재가 650여 일을 넘겼다.
최 회장의 공백으로 SK는 현재 그룹 전체의 미래를 결정지을 굵직한 사안에 대해 사실상 손도 데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경영이나 신사업 개척, 대규모 투자, 공격적 인수·합병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현상 유지'에만 만족하고 있다.
2011년 말 하이닉스를 인수했던 것과 같은 '통 큰 투자'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이닉스 인수 당시 최 회장은 여러 주주와 투자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다. 3조 3000억원이 넘는 인수가액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반전을 이뤄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메모리반도체 부문 세계 2위에 올라있다. 지난해 연매출 규모가 무려 14조 1650억원에 달했다. 영업이익도 3조 3800억원에 이른다. 비약적으로 성장한 만큼 법인세로만 한해 3510억원을 내고 있다. -
그러나 최 회장이 빠지면서 SK하이닉스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는 지금 체질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다. 지난 3분기 기준으로 매출의 97% 가량을 메모리반도체 부문에서 올렸다. 시스템반도체 부문 성과가 지나치게 적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중에서도 D램 부문이 낸드플래시 영역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사업구조의 불균형을 서둘러 개선해야 처지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 낸드플래시나 시스템반도체 등 큰 규모의 투자에 대해선 총수 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매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하고 있는 SK하이닉스가 '총수 부재'라는 악재로 발목이 잡혀있는 셈이다.
총수 부재는 곧바로 투자 위축으로 연결된다. 미래를 내다보는 과감한 투자는 오너의 몫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조원대 투자를 책임지고 할 수 있는 전문경영인이 없기 때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 투자와, 최태원 회장의 하이닉스 인수 등은 오너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면서 "전문경영인은 아무래도 보수적으로 기업을 끌고 갈 수밖에 없는 반면 오너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소신 있는 '통 큰 투자'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이 없는 사이 SK는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선장 없이 배를 몰다보니 여기저기서 허점이 노출되고 있다. 투자를 못할 뿐 아니라 기업의 생명력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
실제 현재 SK 주요 관계사는 대부분 실적 부진과 성장 정체라는 위기를 맞고 있다. SK의 맏형이라고 할 수 있는 SK이노베이션은 글로벌 석유불황으로 영업이익이 갈수록 줄고 있다. SK계열사들의 전반적 실적 부진은 도미노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SK의 지주회사인 SK주식회사와 SK텔레콤도 불똥을 피하진 못했다.
무엇보다 ADT캡스, STX에너지, 호주 UP(유나이티드 페트롤) 지분 인수 등 굵직한 M&A에 참여 자체를 못하거나 철수하는 등 성장 기회조차 번번이 날리고 있다. 해외 자원개발이나 저개발 국가의 통신망 구축 사업 진출 등 해외사업도 사실상 멈춘 상태다.
김창근 SK수펙스(SUPEX)추구협의회 의장은 "전문경영인의 역할은 보조적이다. 과감한 투자나 연구개발(R&D) 부분은 오너의 역할"이라면서 "이런 중요한 부분이 빠진 채로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걱정스럽고 당황스럽다”고 털어놨다.
한편, 최 회장은 지난해 1월 대법원에서 4년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형기의 3분의 1 넘게 마친 상태여서 가석방도 가능하다.
총수가 수감 중이거나 재판을 받고 있어 큰 후유증을 겪고 있는 기업은 SK 뿐만이 아니다. CJ, 효성, 태광그룹 등도 비슷한 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