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잣대 모호…"법전 아닌 판사 성향따라 결정" 비아냥까지"모험적 투자자에겐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비수""고의·목적성 있는 경우로 제한" 주장 힘 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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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인 배임죄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일관성이라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법원의 판결은 여전히 오락가락이다. 똑같이 배임죄 혐의로 기소되더라도 누구는 무죄 박면되고 누구는 유죄를 받아 수년간 옥살이를 한다.

     

    1심 판결이 2심이나 대법원에서 180도 뒤집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이유로 "배임죄는 법전이 아니라 판사의 성향에 따라 결정된다"는 비아냥 섞인 목소리까지 나온다.

     

    왜 그럴까. 배임죄의 처벌기준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형법 제355조 제2항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 이익을 취하거나 제3자에게 이익을 취하게 해 본인에게 손해를 가하는 행위'로 배임죄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행위가 임무에 위배되는지, 허용된 권한 행사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기업인이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한 고의적 경영 판단이 아니더라도 손해를 가했거나 이익을 취했다면 배임이 될 수 있다.

     

  • ▲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전삼현 기업소송연구회 회장(숭실대 법학과 교수)은 "수천, 수만의 주주들로부터 위임을 받은 대기업 CEO에 있어 무엇이 배임인지, 어떤 경우에 처벌받게 되는지 불분명하다"며 "복잡다단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모험적 투자를 해야 하는 경영자들에게 배임죄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비수와도 같은 존재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다수의 기업인이 배임 혐의로 기소돼 법원 재판을 받고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1600억원대 횡령·배임 등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원이 일부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결정해 파기환송심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2011년 1400억원대 횡령·배임혐의로 기소된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은 현재 대법원의 결정을 남겨둔 상황이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도 배임혐의로 기소돼 1심 공판이 진행 중이다.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유·무죄를 다투고 있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지난해 8월 1심에서 배임혐의가 인정됐으나 2심에서 법리다툼을 벌이고 있다.

     

    장세주 전 동국제강 회장도 원정도박과 회삿돈 횡령 외에도 배임혐의가 적용됐다. 우량계열사 유니온스틸을 통해 부실계열사 국제종합기계 채권을 떠안도록 해 회사에 22억원의 손실을 끼친 혐의다.

     

    더 큰 문제는 배임죄로 인해 기업가정신이 꺾여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기업가들이 배임죄란 사슬에 묶여 과감한 투자를 결정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당연히 어두울 수 밖에 없다.

     

    2002년 대법원이 배임죄 판단에서 '경영판단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배임죄가 기업인들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옥좨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경영판단의 원칙'이란 경영자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면 예측이 빗나가 회사에 손해가 발생해도 배임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원칙을 말한다.


    하지만 법원 판결에서 '경영판단의 원칙'이 일관성 있게 적용되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실제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2년 이래 경영판단 관련 배임죄 판례는 37건으로 이중 '경영판단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따져 내린 판결은 절반도 안되는 18건에 불과했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경영판단의 원칙' 적용 여부에 따라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유·무죄 판단이 엇갈린 판례도 12건이나 됐다.

     

    그러다보니 '배임죄의 처별 요건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 ▲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전삼현 회장은 "배임죄를 적용함에 있어 사회가 복잡해진 만큼 사법 당국이 피의자의 고의나 손해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그럼에도 형법상의 대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을 부정하는 배임죄 규정은 사법부에 폭넓은 재량을 허용하면서도 국민 기본권의 핵심인 죄형 법정주의, 과임 금지의 원칙을 침해하는 형벌제도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소한 배임죄의 처별 요건을 명백한 고의성이나 목적성이 있는 경우로 제한하는 형법 개정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배임죄의 미수범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배임죄의 적용범위가 과다하게 확대될 수 있다"며 "배임에 의한 과잉처벌을 막으려면 경영판단원칙을 상법에 도입하고, 상법상 특별배임죄에 '다만, 경영판단의 경우에는 벌하지 아니한다'라는 단서를 삽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