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건설사, 각종 규제로 영역 확장 힘들어시공책임형 CM 활성화 등 제시돼
  • ▲ 최근 국내 건설사도 미국 벡텔처럼 시공보다 설계 등 기술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진은 해외건설 현장ⓒ현대건설
    ▲ 최근 국내 건설사도 미국 벡텔처럼 시공보다 설계 등 기술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진은 해외건설 현장ⓒ현대건설


    먹거리 감소에 직면해 있는 국내 건설사들이 미국 벡텔처럼 시공보다 설계 등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한국판 벡텔'을 위해 통합 발주 등 정부의 규제개혁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벡텔은 설계·구매·조달·시공 등을 총괄하는 종합건설서비스사다. 2014년 기준으로 매출액이 280억여달러에 달하는 미국 1위 건설사며, 전체 매출의 75%를 해외에서 얻고 있다. 시공은 다른 건설사에 맡기는 경우가 많고 주로 설계와 사업관리(CM)에서 이익을 얻는다.  

    9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국내 건설사는 △종합과 전문 건설업 등 업역 간 칸막이 △설계·시공 분리 △신도시, 인프라 등 개발 사업에서 기획·운영 참여 불가 등의 규제로 인해 단순 시공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규제들은 공사 원가 절감과 함께 일부 대형건설사가 공사 수주를 싹쓸이하는 것을 막고 특혜시비를 차단하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국내 건설사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도 작용해 왔다.  

    최석인 건설산업연구원 기술정책연구실장은 "여러 회사가 원청업체를 맡을 수 있으므로 배분정책 측면에선 일부 효과가 있다"면서도 "발주처· 설계사·시공사·유지관리 담당까지 모두 다르다면 효율성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총 공사비 7조8000억여원이 투입된 인천국제공항 건설사업에서 국내 건설사는 설계를 맡지 못했다. 기본 설계는 벡텔이 담당했으며, 여객터미널 설계는 미국 팬트라스가 진행했다.  

    또 벡텔은 한국전력 컨소시엄이 따낸 아랍에미리트 원자력발전소 사업에서 종합설계와 기술자문을 맡는 대가로 사업수익금 46억5000만달러 중 27억9000만달러를 챙기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2008년 △분리 발주 의무화 폐지 △공공건설사업 총괄 책임제도 도입 △기술경쟁 촉진 등을 담은 건설산업선진화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손태홍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종합과 전문 건설사 등 건설업계 구성원들의 규제 개혁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달라 이를 통합하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최근 정부는 다시 규제 개혁에 나서고 있다.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4월 제1차 국토교통 정책자문회의에서 벡텔의 경영 전략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국제 표준과 다른 국내 제도와 관행을 쇄신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쟁력 있는 건설사가 고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한국판 벡텔 탄생을 위해 공공공사 발주 방식 개선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최석인 실장은 "조선업이 해양플랜트 시공 위주로 사업을 하다 큰 손실을 봤고 지금 구조조정 위기에 몰려 있다"며 "국내 건설사가 시공에서 벗어나 벡텔처럼 종합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면 사업 리스크를 줄이면서 입찰 전 단계부터 사업을 구상할 수도 있게 된다"고 전했다.

    이어 "그러려면 건설사가 국내 공공공사부터 설계와 유지 관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정보통신·기계·소방 등을 분리 발주하는 관행도 통합 발주로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영덕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도 "해외건설에서 필수적인 설계·구매·조달(EPC) 능력을 건설사가 국내 공공공사에서 전혀 키울 수 없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도입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시공책임형 CM 발주가 대폭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공책임형 CM은 건설사가 설계에 참여해 시공 노하우를 반영하는 발주 방식이다. 건설사는 설계 완료 전 발주처와 협의해 공사비를 책정한다.

    국내 건설사가 인력, 조직 정비와 기술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최석인 실장은 "벡텔의 경우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구매 조달 등 조직 시스템이 선진화돼 있어 폭넓은 전문 인력을 양성할 수 있다"며 "국내 건설사의 경우 조직 시스템을 재정비하면서 필드 엔지니어링만 강조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설계, 엔지니어링, 파이낸싱 등을 균형 있게 키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영덕 연구위원은 "건설사들이 벡텔 수준으로 기술력을 증진하려면 연구개발에 더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