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훈 사장, 조기 임기 마치고 AIIB로 자리이동…'목적달성'직원들 "사장은 영전위해 예탁결제원을 밟았고, 우리는 짓밟혔다"사장 임기 중 강임 등 불합리 처우 받은 일부직원 재기의지 보여
  • ▲ 유재훈 사장 ⓒ한국예탁결제원
    ▲ 유재훈 사장 ⓒ한국예탁결제원

    한국예탁결제원은 기타공공기관이다.

     

    주식과 채권 등 유가증권을 장부상으로 발행하거나 결제하고, 이를 관리하는 금융기관인 예탁결제원은 자본시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공재다.


    예탁결제원에 예탁된 주식과 채권의 시가총액이 3000조원을 넘은지 오래다.


    천문학적인 수준의 증권들을 예탁받아 안전하게 보관하고 증권의 매매를 처리하는 일이 예탁결제원의 중요한 업무로, 실수와 사고가 용납되지 않는 안정성이 핵심인 곳이다. 예탁결제원이 공공성을 띄어야 하는 이유다.


    다수의 공공기관들이 여전히 신의 직장이라는 인식이 강해 방만경영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공기관이 이같은 여론에 부담을 느껴 민간기업과 경쟁을 시작하고, 돈을 벌어 온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유의 업무를 무시하고 경쟁과 수익창출을 주문하고 이를 추진하게 되면 대형 사고발생 위험 역시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예탁결제원에 사고가 발생하면 이는 곧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마비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영전을 목표로 예탁결제원에 들어온 유재훈 사장 입장에서는 존재감을 발휘할 수 없어 불리한 조건들이었다.


    2일로 유재훈 사장은 2년 11개월간의 임기를 끝냈다.


    자신의 존재감 발산을 위해 지난 3년 동안 수익을 창출하는 회사의 사장, 새롭고 획기적인 사업을 진행하는 회사의 사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작업도 마침표를 찍었다.


    유 사장은 이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국장자리로 옮긴다. 3년간의 영전 노력이 결실을 맺은 셈이다.


    유 사장의 예탁결제원 임기는 27일까지지만 AIIB 회계감사국장 자리에 스스로 지원해 선임되면서 예탁결제원을 떠나는 시기도 20여일 앞당겼다.

    수장 자리가 공석이 되고, 차기 사장에 대한 윤곽도 드러난 것이 없어 업무 공백이 우려될 법도 한 상황이다.


    하지만 직원들의 생각은 다르다.


    임기 중에도 영전에 관심이 많았던 사장 입장에서는 실제로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고, 직원들 입장에서는 본인의 안녕을 위해 회사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던 만큼 임기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사장이 떠나게 됐으니 이번 유 사장과 예탁결제원의 이별은 서로에게 윈윈인 셈이다.


    다만 아름답게 떠나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 유 사장이 이임식을 진행하길 원하고 있지만, 조용히 나가길 원하는 직원들이 이임식에 동원돼 사장과 마주치기 싫다며 끝까지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보여준 사장과 직원들의 관계처럼 이별 준비도 순탄치만은 않은 것이다.


    물론 유 사장은 취임 직후부터 직원들과 선을 그을 생각은 아니었다. 자본시장을 위해 봉사할 마음도 있었다.


    2013년 11월 취임한 그는 한동안 모임마다 상승장의 빨간색을 기원하는 의미로 홍주를 챙겨와 잔을 부딪히며 국내 증시의 활황을 기원했다.


    일산센터를 지방 이전 공공기관의 종전 부동산 매각법에 따라 팔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선산을 팔아야 한다"며 탄식하기도 했다.


    예탁결제원 일산센터는 직원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낸 예탁결제원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홍주'와 '선산 발언'은 유 사장이 취임 초에는 예탁결제원의 사장으로서 증권업계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한편, 직원들과도 섞이겠다는 다짐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의 다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행정고시 26회로 공직에 입문한 이후 쌓아온 화려한 경력 비해 예탁결제원 사장 자리는 오버스펙이란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유 사장은 3년의 임기 기간동안 예탁결제원을 업계에서 돋보이게 만들어 수장인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예탁결제원 이후 더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힘을 쏟기 시작했다.


    우선 유 사장은 예탁결제원의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경쟁체제로의 전환을 직원들에게 주문했다.


    또 민간기업의 궁극적 목표인 수익성 확대와 사업 다각화도 추진했다.


    퇴직연금 플랫폼 '펜션클리어'와 자본시장과 정보기술을 융합한 '캡테크'는 유 사장이 임기 중 가장 많이 거론한 단어로 꼽힌다.


    그러나 42년 동안 고유의 업무에 충실했던 예탁결제원을 영전 문제로 3년 만에 바꿔놔야 하는 사장이 들어온 이후 많은 직원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유 사장은 여론의 단골 먹잇감인 방만경영 탈피를 위해 일방적으로 급여를 깎았고 복리후생을 줄였다. 


    인건비 절감차원에서 직원들의 직책과 직급을 강등시켰다. 이 과정에서 특정 기수가 무더기로 피해를 보기도 했고, 결국 전 노조와 사장과의 밀실협약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유 사장의 정책에 따르는 직원들과 반기를 든 직원들간의 거리도 멀어졌다. 내부 살림이 완전히 썪었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나왔고, 직원들의 숨통만은 트여달라며 대화도 꾸준히 요청했다.


    반면 유 사장은 예탁결제원을 언제까지 한국거래소의 후선업무회사로 둘 수 없고, 민영화를 추진하겠다는 하나의 목표만 바라보며 수익성 발굴과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본인의 입신을 위해 예탁결제원의 인적·물적자원을 사적으로 활용했다는 비난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외부강연, 집필 등 개인 업무는 물론 중국 사업 추진에 예탁결제원의 자원을 이용했고, 그 결과물이 중국 주도의 AIIB 입성이라는 이야기를 직원들은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국내외 금융기관, 기업, 학계 등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인증사진을 찍었고, 취임 이후에는 월 1회 꼴로 해외 출장길에 나섰다. 취임 이후 유 사장의 해외 출장은 총 33차례다.


    이사회 의결만으로 성과연봉제가 도입돼 노조를 중심으로 한 직원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던 지난 6월에도 유 사장은 비행기에 두차례나 몸을 실어 직원들의 공분을 샀다.


    지난해 7월에는 국무총리실 산하 감찰팀이 부산본사를 예고 없이 방문해 유 사장의 해외출장 내역을 확인하고 갔지만 유 사장의 해외출장은 계속됐다.


    유럽 출장에는 항상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며 직원들의 의혹과 반발을 샀다. 파리는 유 사장의 딸이 유학 중인 곳이다.


    결국 업무추진비를 이용해 지구 다섯바퀴 반, 22만 킬로미터를 비행하며, 인증사진을 촬영한 노력 끝에 유 사장은 영전할 수 있었다. 이제서야 유 사장의 스펙과 어울리는 자리로 간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대신 세계 각국을 다니며 맺은 MOU와 벌려놓은 초기 사업들에 대한 뒷처리는 후임 사장과 직원들이 떠안게 됐다.


    "어디서 또 누가 와서 조직을 뒤바꿀지 모르니 참고 있자"던 직원들의 바람이 오늘로 이뤄졌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 어떤 인물이 새로 예탁결제원 사장 자리에 앉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유 사장 재임 중 피눈물을 쏟았던 직원들 일부는 조용히 갈아왔던 칼을 꺼낼 조짐이 보인다는 점에서 내부 진통이 우려된다.


    막혔던 소통창구를 한번에 뚫겠다는 직원들도 있고, 유 사장에 협조한 직원들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어 복수가 또다른 복수를 부를까 우려된다.


    이미 예탁결제원의 미래와 대한민국 자본시장을 위해 낙하산 사장 취임에 대한 강경투쟁 태세도 갖췄다.


    "유 사장은 영전을 위해 잠시 머물던 예탁결제원을 밟고 일어섰지만 우리는 삶의 터전을 짓밟혔다. 낙하산도 품격은 있어야 했다."


    떠나는 사장에 대해 한 직원이 건넨 이야기다.


    이 말이 전체 직원들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적지 않은 직원들이 이 말에 공감하고 있다.


    21대 예탁결제원 사장의 역할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