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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시장의 큰 손'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에 대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방침을 밝히면서 기업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국민을 위한 주주를 표방하지만 정부가 인사권을 쥐고 있는 형편에 정권의 주주가 될 가능성이 더욱 높기 때문이다.
이사장뿐 아니라 기금운용본부장(기금이사, CIO)도 사실상 정부에서 결정하는 만큼 정부 기조에 반하는 의사결정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이 기업을 지배하는 '연금사회주의'를 걱정할 지경이다.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30일 위원회에 참석해 "한진그룹 오너 일가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 해소를 위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라"라고 지시했다. 이번 조치는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로 촉발된 대한항공 사태가 주가 하락으로 이어져 국민연금 가입자에 피해를 입혔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국민연금은 한진그룹의 지주회사인 한진 칼에 이어 대한항공 지분 12.5%를 가진 2대 주주다.
기금운용위는 박 장관의 지시에 따라 대한항공을 상대로 △우려 표명 △대책을 강구하는 '공개서한' 발송 △경영진 면담 등 3가지 방식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방침이다. 국민연금이 이런 방식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주주 권한으로 의결권 찬반, 기업 배당 확대 등의 제한적 조치를 시행해 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임에도 주주권 행사를 제안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다가 정부가 국민연금을 재벌 개혁 수단으로 삼아 향후 행보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한항공을 '시범 케이스'로 삼으려 한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건 국내 주식시장 내 국민연금의 엄청난 영향력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올해 1분기 말 기준 국내 주식시장에 131조원을 투자하고 있다.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기업만 276개에 달한다.
더욱이 국민연금은 삼성전자(9.5%)를 비롯해 SK하이닉스(9.9%), 현대자동차(8.4%), 네이버(10.8%), LG화학(9.1%), 신한지주(9.6%) 등에서 1대 또는 2대 주주 지위를 갖고 있다. 그런만큼 국민연금의 결정에 따라 개별 기업의 운명이 갈리기도 한다. 3년 전 박근혜 정부 당시 있었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최근 현대자동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무산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지분만 앞세워 기업 경영에 사사건건 개입한다면 기업의 자율성 확보는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며 "이는 또다른 갑질의 형태로, 기업 이익 증대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