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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지역밀착형 SOC투자를 강조하고 있다. 과거 토목 중심의 SOC사업 대신 체육시설이나 도서관처럼 생활과 밀접한 인프라를 확충해 국민 삶의 질을 높이면서 양질의 일자리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자치단체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사업 대부분이 국비와 지방비를 매칭한 공모방식으로 추진되는 만큼 재원 마련이 어려운 지자체들은 공모나 참여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지역밀착형 생활 SOC 확충 방안'을 발표했다.
생활 SOC란 체육시설이나 도서관, 전통시장 주차장, 작은 어촌의 포구처럼 생활과 밀접한 인프라를 새로 짓거나 정비하는 것을 뜻한다. 정부가 도로, 철도 개·보수와 같은 전통적 토목 SOC와 구분하기 위해 새로 꺼내든 개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서울 은평구 구산동 도서관마을을 방문한 자리에서 "과거에는 대규모 SOC 위주의 정책으로, 주로 도로와 철도·공항·항만에 투자해 이를 기반으로 산업을 일으키고 경제를 발전시켰으나 일상에 필요한 생활기반시설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며 "대규모 토목 SOC와 차별화해 생활 SOC라 부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노후 산업단지 재생이나 공공임대주택 시설 개선 등 일부 사업의 경우 전통 SOC와 겹치지만, 대부분은 다르다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무엇보다 생활 SOC는 지역 단위로 재원 투자가 가능해져 지역 기반의 서비스업이나 건설업 일자리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정부는 △여가·건강 활동 △지역 일자리·활력 제고 △생활안전·환경 등 3대 분야, 10대 과제를 선정하고 이 분야의 투자를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올해 5조8000억원 규모이던 관련 예산을 내년도 8조7000억원으로 1.5배 늘리기로 했다. 지자체 투자까지 포함하면 총사업규모는 약 12조원이다.
김동연 부총리는 "지역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동시에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부가 관련 예산을 크게 늘렸지만, 지자체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정부가 추진하는 생활 SOC사업은 국가시설이나 민간 융자사업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모를 거쳐 국비와 지방비로 분담하는 방식으로 추진되기 때문이다.
사업별로 차이가 있지만, 분담비율은 국비와 지방비 50%씩으로, 8조7000억원의 예산(안)에 더해 지자체가 분담해야 할 매칭 사업비만 총 3조3000억원에 달한다.
토목 SOC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개별 사업비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광역시·도를 비롯해 재정자립도가 우수한 지자체에는 크게 부담이 없다. 일부 지역의 경우 타 지역보다 더 많은 사업과 예산 확보를 위해 TF를 꾸리는 등 벌써부터 경쟁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생활 SOC가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지방 시·군·구 등 기초지자체 입장에서는 사업별 혹은 다수의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매칭사업비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다.
실제 광역시인 대전시가 자치구와 매칭 방식(5대 5)으로 추진한 도시재생 뉴딜 사업만 보더라도 매칭사업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은 몇몇 자치구들이 사업을 포기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시는 자치구의 재원조달 부담 경감을 위해 매칭비율을 7대 3으로 낮춰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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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SOC사업을 추진하는 지방 기초지자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민 편의와 관광 활성화를 위한 사업들이 많지만 매칭 사업비를 고려하면 많아야 3~4건 정도 공모에 참여할 수 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이마저도 재정자립도가 우수한 지자체와의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충남권 한 기초지자체 관계자는 "시설수요는 넘쳐나는데 매칭사업비를 고려하면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은 2~3건에 불과하다"며 "이마저도 재정이 넉넉한 시·군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과연 몇 건이나 건질 수 있을 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결국 매칭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재정자립도가 높은 지자체들에게 SOC 예산이 집중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2018 행정안전통계연보'를 보면 광역지자체별 재정자립도는 서울 82.5% 세종 69.2% 인천 63% 경기 59.8% 순으로 편차가 크다. 반대로 기초지자체 86곳의 경우 재정자립도가 10~20%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렇다보니 기초지자체와 지역민들은 원활한 생활 SOC사업 추진 및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국비 지원비율을 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방 매칭비율을 30% 이하로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정자립도에 따라 지원비율을 차등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과 함께 사업대상 선정방식도 지역별 낙후도나 시설별 시급성 등에 가중치를 적용,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건설협회 한 관계자는 "정작 생활 SOC가 필요한 지자체는 조그만 시·군·구다. 정부가 내년 관련 예산을 크게 늘렸지만, 재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자체들에게 '그림의 떡'인 셈"이라며 "이런 곳들에게 지역밀착형 SOC 예산의 혜택이 돌아가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SOC 조성보다는 현재 노후화된 시설물에 대한 투자 및 보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시설안전공단이 관리하는 대형 SOC 시설물만 보더라도 30년이 넘은 시설 비중이 2014년 10%에서 2024년에는 22.2%로 급증할 전망이다. 또 서울시내 상·하수도의 48%는 이미 30년을 넘은 상태다.
이상호 건설산업연구원 원장은 "정부의 SOC 예산은 1970년대부터 누적된 인프라의 감가상각비, 즉 재투자비용을 빼놓고 계산한 것"이라며 "이를 방치할 경우 경제 성장에도 직격탄이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