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1500억 투자 결정 vs DL, 자금 지원 미정DL "경쟁력 강화방안부터"… 한화 "정상화부터"수습해도 상처… 직원·지역·협력사 불안 가중日, 정부 주도 구조 개편… 벤치마킹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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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천NCC의 디폴트 위기로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어려움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동안 업계 곳곳에서 위험신호가 꾸준히 감지됐지만, 정부는 손을 놓고 기업 자구책에만 기댄 사이 우리 산업을 떠받치는 석유화학업계는 고사 위기에 내몰렸다.

    과거 일본은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통해 석유화학제품 생산 물량을 축소하고 기업을 통합, 경쟁력을 강화해 위기를 모면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제라도 정부가 일본을 벤치마킹, 구조조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 생산능력 국내 3위인 여천NCC는 최근 자금난으로 부도 위기에 몰려 있다. 여천NCC를 합작 설립해 지분을 50%씩 보유한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자금 투입을 놓고 이견을 보이며 여천NCC의 생존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여천NCC는 오는 21일까지 3100억원의 운영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한화솔루션은 이에 지난달 30일 이사회에서 여천NCC에 1500억원을 지원하기로 하고 DL그룹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여천NCC는 합작 계약에 따라 증자 또는 자금 대여에서 한쪽 주주 단독 추진이 불가능하다.

    DL그룹은 그러나 자금 지원을 거부해오다 이날 긴급이사회를 열고 ▲DL케미칼은 약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하고, ▲DL㈜는 DL케미칼 유증에 1778억원 규모로 참여하는 내용의 자금 조달안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 자금이 여천NCC에 투입될지는 미정이다.

    DL그룹 관계자는 “여천NCC에 자금을 지원할지, 얼마를 언제 투입할지는 미정”이라며 “한화와 공동으로 운영 중인 TFT를 통해 여천NCC에 대한 경영상황을 꼼꼼히 분석한 뒤 실질적인 경쟁력 강화 방안과 제대로 된 자생력 확보 방안을 도출해 실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DL그룹이 여천NCC의 지원을 위한 실탄을 마련한 가운데서도 불안감은 여전하다. DL그룹이 “아무런 설명과 원인분석 없이 무작정 자금만 투입하는 것이야말로 책임경영을 외면하는 것”이라며 자금 투입에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서다.

    특히 DL그룹은 여천NCC로부터 받는 원료 공급계약에서 한화만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데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DL은 여천NCC 원료가 갱신계약에 최소 변동비 부분이 확보되는 방향으로 협상을 하고 있는데, 가격 하한을 없애자는 한화의 입장이 고수되면서 가격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에 한화그룹은 “여천NCC에 자금이 지원되려면 DL케미칼의 자금 지원 이사회, 합작법인인 YNCC 이사회 주주사로부터 차입 결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어떠한 조치도 없는 상황”이라며 “신속한 자금 지원 이후 공급계약은 협상을 통해 공정한 조건으로 체결하자”고 강조했다.

    한화그룹과 DL그룹의 의견 합치로 여천NCC가 부도 위기를 넘긴다 해도 상처는 남게 됐다. 앞서 DL그룹의 자금 지원 거부에 대해 여천NCC 내부와 협력사, 지역사회에선 ‘무책임하다. 실망스럽다’는 의견이 쏟아졌고, 연쇄 디폴트 우려로 석유화학업계 전체에 불안감이 확산됐다.

    여수산단 관련 소규모 업체 종사자는 “업종 전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감 없는 결정에 실망스럽다”면서 “여천NCC가 잘못되면 여수산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석유화학업계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업계 구조 개편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국의 최대 고객이던 중국은 2020년 이후 자급체계를 갖추며 우리나라보다 다섯 배 많은 연 5200만톤(t)의 에틸렌을 생산하는 최대 경쟁자로 떠올랐다. 중동 국가들도 막대한 ‘오일머니’를 무기로 에틸렌 생산능력을 키우고 있다.

    주요 석유화학기업들은 설비 폐쇄와 인수합병(M&A)을 추진 중이나, 이해관계 충돌로 진척이 느리다. 대표적으로 HD현대케미칼과 롯데케미칼의 (나프타분해설비)NCC 통합 협상이 자산 가치 평가 등에서 이견을 보이며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석유화학업계에선 일본처럼 정부 주도의 개편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초부터 석유화학 구조 개혁을 추진해 범용제품 생산능력을 감축하고, 기업 통합을 통해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당시 일본 통상산업성은 에틸렌 생산능력 10% 이상 감축을 목표로 ‘석유화학 재편 계획’을 마련, 주요 석유화학 기업 합병과 설비 폐쇄를 권고했다. 그 결과 미쓰비시화성과 미쓰비시석유화학이 합병해 미쓰비시화학이 출범했고, 미쓰이도아쓰와 미쓰이석유화학이 합병해 미쓰이 화학이 만들어졌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은 금융 지원과 세제 혜택을 제공해 업계가 약속을 이행하도록 유도했다”며 “결과적으로 일본 에틸렌 생산능력은 세계 2위 수준에서 현재 7위로 낮아졌고, 고부가 제품 전환으로 수익성을 회복했다. 우리도 일본처럼 과감한 감축 없이는 회복이 어려울 것”이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