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부격차 심화, 경제 위기 촉발하는 '도화선' 고용 한파·물가 급등 '이중고' … 내수경제 직격탄수요 줄고 비용 급증 … 막히는 중소기업 자금줄 수출 플러스 착시 … 반도체 빼면 마이너스 전환
  • ▲ 서울 명동거리 한 공실 상가의 모습. ⓒ연합뉴스
    ▲ 서울 명동거리 한 공실 상가의 모습. ⓒ연합뉴스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고용 악화로 저소득층이 어려움이 커지며 경기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 것처럼, 한국 역시 심화되는 양극화가 경제 전반에 부담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고용시장 한파가 장기화하는데도 생활밀접 품목 가격은 가파르게 뛰어 가계의 가처분 소득이 빠르게 깎이고 있다. 그 결과 소비는 둔화하고 내수 의존산업일수록 직격탄을 맞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수출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반도체 부문 호조에 기대고 있지만 자동차를 포함한 다수 품목의 부진으로 전체 수출 흐름은 둔화하고 있다. 이른바 '반도체 착시'로 그마저도 해외 공장 투자 확대 등에 기인한 결과여서 국내 고용이나 설비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경제 전반에 '양극화 리스크'

    존 윌리엄스 총재는 지난 9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저소득층이 고용시장 냉각으로 경제적 압박에 놓인 반면 고소득층은 주식시장 호황을 누리는 등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같은 불균형이 미국 경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윌리엄스 총재는 미국 노동시장 둔화 속에 나타나는 이 같은 '분절된 가계 행동'이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금리 인하 여부를 가르는 핵심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국만의 특수성이 아니다. 한국 역시 계층 간 격차가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올해 2분기 1분위(하위 20%) 가구의 월 소비 지출은 130만4000원에 그쳤다. 지출 내역을 살펴보면 생계의 팍팍함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식료품·비주류 음료(22%), 주거·수도·광열(19.4%), 보건(11.3%)이 전체 지출의 절반 이상(52.7%)을 차지했다. 생계 유지에 필요한 기본 비용 만으로 월 지출의 상당부분이 소진되는 구조다. 

    반면 5분위(상위 20%) 가구의 월 소비 지출은 494만3000원으로 1분위의 3.79배에 달했다. 식료품·비주류 음료(12.5%), 주거·수도·광열(8.7%), 보건(7.2%) 등 기본 생활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8.4%에 그쳤다. 대신 음식·숙박(15.6%), 교통·운송(15%), 오락·문화(6.8%), 의류·신발(5.5%) 등 여가 소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며 계층별 격차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양상을 보였다. 

    양극화는 자산시장에서도 더욱 확대되고 있다. 11월 들어 코스피가 4000선을 돌파하며 활황 국면에 진입하자 고액자산가 자금이 증시로 이동하는 '머니무브(자산이동)' 현상이 가팔라지고 있다. 또 KB부동산 월간 주택가격 동향 시계열 자료에 따르면 고가 아파트와 저가 아파트간 가격 격차가 확대되면서 서울 아파트 5분위 배율은 6.8로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찍었다. 

    반면 서민경제의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물가는 먹거리를 중심으로 고공행진을 지속하며 저소득층과 서민들의 소비를 옥죄고 있다.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4%로 지난해 7월(2.6%)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며 수산물(5.9%)과 축산물(5.3%)을 중심으로 농축수산물 물가가 3.1% 뛰었다. 가공식품(3.5%)과 외식(3.0%)도 일제히 오르며 장바구니 부담을 키웠다. 석유류(4.8%)도 지난 2월(6.3%)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다. 

    자산가일수록 자본력을 기반으로 상승장의 과실을 빠르게 획득하는 반면 하위층일수록 물가 부담에 발목이 잡혀 투자는 커녕 지출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양극화 구조가 고착되며 계층 이동 사다리는 점점 끊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의 고용 여건도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10월 고용행정통계로 본 노동시장 동향'에 따르면 구직자 한 명당 일자리 수를 뜻하는 구인배수는 0.42로 떨어졌다. 구직자 한 명당 일자리가 0.5개도 채 되지 않는 것으로 구조적인 일자리 부족이 심화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이는 전년 동월(0.49)보다 낮은 수준이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0월(0.19) 이후 같은 달 기준으로 최저다. 

    IMF 이후 최악의 수준의 고용지표가 나온 배경에는 안정적인 일자리로 분류되던 제조업과 건설업의 위축이 자리한다. 제조업 가입자 수는 384만4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1만4000명 감소해 5개월 연속 내림세를 기록했다. 건설업 역시 업계 장기 불황과 공사 중단 등의 여파로 가입자가 74만7000명에 그쳐 27개월째 내리막이다. 
  • ▲ 경기도 평택항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모습.ⓒ연합뉴스
    ▲ 경기도 평택항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모습.ⓒ연합뉴스
    ◆ 수출 '반도체 편중' 경고등 … 무너지는 실물 경제 

    실물경제 기반인 제조업에서는 이미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내수 부진이 장기화하고 미국의 관세 압박과 중국발 공급 과잉까지 겹치면서 제조 중소기업들이 한계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수요는 줄고 비용은 늘어난 데다 외부 충격까지 더해지면서 자금 흐름이 곳곳에서 막혀가고 있다.  

    중소기업 대출 비중이 높은 IBK기업은행의 통계는 이를 반증한다. 올해 3분기(7∼9월) 대출 연체율은 1%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거진 2009년 1분기(1.02%)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3분기 기업 대출만 따로 살펴보면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연체율은 1.03%로 2010년 3분기(1.08%) 이후 15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기업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비중은 전체 여신의 82.9%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소기업 자금 사정이 경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또 내수 회복이 지연되면서 창업의 불씨는 꺼지고 시장에서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소멸기업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의 '2024년 기업생멸행정통계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신생기업은 92만2000개로 전년 대비 3만3000개(3.5%) 줄었다. 이는 2017년(92만1836개) 이후 7년 만에 최저 수준이자 4년 연속 내리막이다. 

    반면 지난해 소멸기업 수는 지난해 79만1000개로 전년 대비 5.3% 증가하며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창업은 줄고 폐업은 늘어나며 경제 활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반증했다. 

    수출 상황도 녹록지 않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수출 증가세를 떠받치고 있지만 다른 주력 산업은 줄줄이 뒷걸음질치고 있어서다. 

    수출이 지난 6월 이후 5개월 연속 전년 동기 대비 플러스 흐름을 유지한데는 반도체 수출 호조 덕분이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157억3000만달러로 10월 기준 역대 최고치를 새로 썼고,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6.4%에 달했다. 

    수출 2위 품목인 자동차(55억5000만달러)의 2.83배에 이르는 규모로 사실상 단일 품목이 전체 수출 흐름을 견인하는 '반도체 편중' 현상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하지만 이 같은 반도체 효과를 걷어내면 수출 전반에는 이미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올해 1월부터 10월 25일까지 실적 기준 누적 수출액은 5646억3300만달러로 전년 동기(5545억2600만달러) 대비 1.82% 늘어났다. 하지만 반도체(1314억6000만달러)를 제외하면 수출액은 4331억7300만달러로 전년(4423억8200만달러)보다 2.08% 감소했다. 

    지난달 주요 15대 수출 품목을 보면 편중 현상은 두드러진다. 수출이 증가한 품목은 반도체, 선박, 석유제품, 컴퓨터 단 4개에 그쳤고 자동차, 차부품, 이차전지, 철강, 일반기계, 가전, 무선통신, 석유화학, 디스플레이, 섬유, 바이오헬스 등 11개 품목은 일제히 감소세로 돌아섰다. 결국 전체 수출의 증가세가 반도체 독주에 의존하는 수출 구조의 취약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더욱이 반도체 수출 호황이 정작 국내 경기 회복으로 직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뼈아픈 대목이다. 실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발 관세 리스크와 국내 규제 부담을 피하기 위해 투자의 중심축을 해외로 옮기고 있어서다. 수출로 발생한 수익이 국내 설비 투자나 신규 일자리로 이어지지 않고 해외 공장 증설과 현지 인력 채용에 투입되면서 수출 호황의 낙수효과는 갈수록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자본집약적 산업인 반도체 특성상 대기업 중심 구조가 불가피해 반도체 호황이 곧바로 가계 소득 증가나 내수 진작으로 번져가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도 있다.

    수출 호황 속 대기업 쏠림 현상도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3분기(7~9월) 기업 특성별 무역 통계'에 따르면 올 3분기 국내 기업 6만9808곳의 수출이 1850억달러로 분기 기준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LG전자 등 수출액 상위 10대 기업이 전체 수출액의 40%(740억달러)를 쓸어담으며 처음으로 40%대에 올라섰다.

    상위 100대 기업의 수출액 비중도 67.6%에 달해 국내 수출 기업의 0.14%가 수출의 3분의 2를 책임지는 구조로 나타났다. 수출 호조에 3분기 성장률이 1.2%로 기록했지만 수출 성과가 수출 톱10 기업에 편중되면서 내수 진작으로 이어지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단순한 소득 격차를 넘어 경제 구조의 불균형으로 확대돼 경제 성장 잠재력을 잠식하는 큰 요인이 되고 있다"며 "경제 성장의 과실이 특정 산업과 계층에 집중되면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장기적으로는 성장의 선순환 구조가 붕괴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양극화 문제와 수출 편중 리스크는 동전의 양면"이라며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내수와 수출이 균형 잡힌 선진형 성장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