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정 신규 원전은 여론에 맡기고, SMR은 강행원전 건설 여부 여론조사로… "정책 책임 회피"SMR 내세워 탈원전 비판 피하겠단 의도란 분석정책 일관성 붕괴에 AI 전력수요 폭증 속 리스크↑전문가·업계 "정권 입맛 따라 국가 에너지 뒤흔들어"
  • ▲ 김성환 기후부 장관. ⓒ뉴시스
    ▲ 김성환 기후부 장관. ⓒ뉴시스
    정부가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이미 확정된 신규 원전 건설 문제를 국민 여론조사와 대국민 토론으로 결정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신규 원전 건설은 보류하고 기술 개발이 완료되지 않아 도입 시기가 불투명한 소형원전모듈(SMR)은 2035년에 가동하겠다고 하면서다. 도입이 불확실한 SMR을 띄워 '탈원전' 비판을 피하겠다는 꼼수로 읽힌다. 원전 업계에서는 "정권 입맛에 따라 국가 에너지정책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12일 기후에너지환경부에 따르면, 정부는 신규 원전 건설 문제와 관련한 국민 여론조사와 대국민 토론회를 어떤 방식으로 진행 할 지 실무 논의에 착수했다. 

    이는 김성환 기후부 장관의 발언에 따른 것이다. 김 장관은 지난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1차 총괄위원회 회의에서 "11차 전기본에 반영된 신규 원전 2기의 건설 여부를 국민 여론조사와 대국민 토론회를 거쳐 조기에 확정해 12차 전기본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월 확정된 11차 전기본에는 설비용량 1.4GW(기가와트)급 대형 원전 2기를 건설해 2037~2038년 도입한다는 계획이 담겼다.김 장관은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도 "신규 원전 2기 문제를 어떤 절차를 거쳐 판단할지 올해를 넘기지 않고 정하겠다"고 했다. 반면 SMR에 대해서는 "2028년까지 설계, 2030년까지 허가, 2030년 이후 설치를 시작해 2035년에 발전을 하겠다"며 구체적인 도입 시기까지 못 박았다. 

    이를 두고 원전 업계에서는 "SMR을 내세워 탈원전 추진 비판을 피하기 위한 꼼수",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의 백지화 수순"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또 신규 원전 건설 문제가 정치 쟁점화 되면 결국 현재 여권에 유리한 여론 구도대로 흘러가지 않겠느냐는 말도 나온다.  

    실제 김 장관 발언 직후 친여 성향 시민단체들이 신규 원전 건설 계획 취소를 요구하고 나서는 등 벌써부터 여론전이 진행되고 있고, 원전 업계에서는 '탈원전 시즌2'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 9월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 이후 정부의 '원전 홀대', '재생에너지 확대' 기조가 본격화됐다. 이 대통령은 당시 "원자력 발전소 짓는 데 15년이 걸린다"고 주장하며 "재생에너지를 대대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추가 원전 착공은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의 원전 발언 이후 지난 2월 11차 전기본에서 확정된 신규 대형 원전 건설을 위한 부지선정 절차가 중단됐다. 이런 상황에서 김 장관이 신규 원전 건설 문제를 여론조사와 대국민 토론회 결과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은 것이다.

    김 장관의 발언 하루만에 시민단체와 환경단체가 신규 원전 건설 계획 취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과 울산기후위기비상행동은 10일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12차 전기본에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계획이 반영돼서는 안 된다"며 "이재명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영덕핵발전소반대범군민연대 등 경북지역 시민사회환경단체도 같은날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문제는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이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백지화되면 AI(인공지능) 수요 폭증으로 인한 전력 수급에 상당한 차질을 빚게된다는 점이다.

    AI 산업 급성장으로 전력 수급계획에 비상이 걸리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원전 르네상스'를 선언하면서 2030년까지 신규 대형 원자로 10기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2050년까지 현재 100GW 수준인 원전 용량을 4배인 400GW까지 늘리겠다는 것이다.

    영국은 지난해 '민간 원자력 로드맵 2050'을 발표하며 2050년까지 원전 설비용량을 24GW까지 확보하겠다고 발표했고, 중국은 현재 5% 수준인 원전 발전 비중을 2035년까지 신규 원자로 150개를 건설해 10%로 늘린다고 했다. 

    일본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겪었음에도 원전 운전기한인 60년을 실질적으로 연장하는 것을 허용하는 'GX 탈탄소 전원법'을 제정하며 '원전 허용'으로 방향을 틀었다.

    유럽 탈원전 1호 국가인 이탈리아는 지난해 7월 탈원전 폐기를 선언한 뒤 지난 3월 원자력 기술 사용을 허용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스위스도 2017년 국민투표를 통해 신규 원전 건설을 금지했다가 7년 만인 지난해 8월 탈원전 폐기를 발표했다.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원전 30%, 재생에너지 30%'라는 에너지믹스를 통해 전력 수급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런 일환으로 지난 9일 현재 연간 0.35GW(기가와트) 수준인 해상풍력 발전을 연간 4GW씩 늘려 2030년 10.5GW, 2025년 25GW로 만들겠다는 내용의 '해상풍력 기반시설(인프라) 확충 및 보급 계획'을 발표했다. 아울러 현재 2GW(기가와트) 수준인 육상풍력 발전 규모를 2035년까지 6배인 12GW로 늘리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후와 지형이 재생에너지 발전에 불리한 구조여서 안정적인 전력 수급을 위해선 신규 원전 건설이 필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신규 원전 건설 문제를 여론에 맞긴다는 것은 여권 지지층에게 백지화 명분을 만들어 달라는 의미 아니냐"며 "국가 에너지정책은 진영 논리가 아니라 국익의 관점에서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이미 지난 정권에서 여야가 합의해 결정한 11차 전기본에 대해 또다시 여론조사 등을 운운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 또는 장관 입맛대로 에너지정책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