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만 번지르르한 '사상 최고치', PBR·PER은 여전히 신흥국 수준"국장 탈출은 지능순?" 신뢰 잃은 시장, 서학개미 이탈 가속대형주만 독주하는 'K-양극화', 코스닥, 좀비기업 인큐베이터 전락
  • ▲ 매봉산 일출ⓒ구로구
    ▲ 매봉산 일출ⓒ구로구
    "지수는 4000을 찍었는데, 제 계좌는 파란불입니다"

    지난해 코스피가 사상 최초로 4000포인트에 안착하며 '꿈의 고지'를 밟았지만, 여의도 증권가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축포가 터져야 할 시점에 투자자들의 냉소만 흐른다. 지수라는 '숫자'는 선진국 문턱을 넘었지만, 국내 자본시장의 체질은 여전히 개발도상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2026년 병오년(丙午年), 대한민국 자본시장은 '성장통'을 넘어 '생존'을 위한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싼 게 비지떡" … 코스피 4000의 허상

    새해 첫 거래일인 2일 오전 코스피 지수는 4200선에서 강보합 출발했다. 우리 증시를 이끌어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강세로 출발했다. 

    지난해 '사천피' 고지를 밟은 데 이어 올해도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지만 우리 증시는 여전히 '저평가'의 늪에 빠져 있다. 숫자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업의 청산가치 대비 주가 수준을 나타내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여전히 1배 수준을 맴돌고 있다. 미국(S&P500)이 4~5배, 심지어 잃어버린 30년을 극복한 일본(Nikkei225)조차 2배를 상회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소수의 초대형 반도체·배터리 기업이 지수만 끌어올렸을 뿐, 대다수 상장사의 기업가치는 제자리걸음이라는 방증이다. 실제로 국내 증시의 주가수익비율(PER) 역시 주요국 대비 현저히 낮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한국 시장은 여전히 기업 가치 제고(Value-up)보다는, 단기 차익을 노리고 빠지는 'ATM(현금인출기)'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떠나는 개미 잡을 명분이 없다"

    개인 투자자들의 '탈(脫)한국' 현상은 이제 일시적 유행이 아닌 구조적 흐름으로 굳어졌다. 금융투자협회 등에 따르면 서학개미의 미국 주식 보관금액은 매년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대주주에게만 유리한 기업 거버넌스 ▲예고 없는 물적분할 ▲주주환원에 인색한 배당 성향 등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 원인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인 수급에 따라 하루에도 몇 퍼센트씩 출렁이는 변동성은 개인들에게 "국장은 도박판"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국내 증시가 장기 투자처로서의 매력을 잃었다"며 "세제 혜택 등 장기 보유에 대한 확실한 인센티브(유인)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자본 유출은 가속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대-중소형주 양극화와 '좀비기업'의 늪

    시장의 허리는 끊어졌다. 코스피 대형주가 글로벌 자금 유입으로 밸류에이션을 확장하는 동안, 중소형주는 철저히 소외됐다. 낙수효과는 사라졌고, 수급 불균형은 극심해졌다.

    더 심각한 것은 코스닥 시장이다. 혁신 기업의 요람이 되어야 할 코스닥이 한계기업(좀비기업)의 연명처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기업들이 테마주로 엮여 주가 조작의 대상이 되거나, 전환사채(CB) 돌려막기로 시장의 건전성을 갉아먹고 있다.

    ◇ 정부, "떠난 개미 돌아오라" … 세제 혜택·좀비 퇴출 '총력전'

    정부 역시 '속 빈 강정'이 된 증시의 위기감을 감지하고 2026년을 기점으로 칼을 빼 들었다. 금융당국과 기획재정부가 연말 잇따라 내놓은 대책은 '당근(세제 혜택)'과 '채찍(퇴출 및 감시 강화)'으로 요약된다.

    우선 '서학개미'의 발길을 돌리기 위한 파격적인 세제 카드가 나왔다. 기획재정부는 해외주식을 매각한 자금을 국내 주식에 장기 투자(1년 이상)할 경우, 해외주식 양도소득세를 한시적으로 감면해 주는 '국내시장 복귀계좌(RIA)' 제도를 신설했다. 또한, 환손실을 우려하는 투자자를 위해 개인용 선물환 매도 상품을 도입하고, 이에 대한 양도세 혜택까지 부여하며 수급 불균형 해소에 나섰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범으로 꼽히던 '자사주 마법'도 차단한다. 금융위원회는 상장사가 자사주를 대주주 지배력 강화에 악용하지 못하도록 공시 의무를 대폭 강화했다. 앞으로는 자사주 보유 비중이 1%만 넘어도(기존 5%) 보유 현황과 처리 계획을 연 2회 상세히 공시해야 한다. 특히 당초 밝힌 처리 계획과 실제 이행 내역이 30% 이상 차이가 날 경우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도록 하여 시장의 감시 기능을 높였다.

    '좀비기업'이 넘쳐나는 코스닥 시장은 '다산다사(多産多死)' 구조로 대수술에 들어간다. AI·우주 등 혁신 기업의 상장 문턱은 낮추되, 부실기업의 퇴출은 신속하게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당장 2026년 1월부터 코스닥 상장폐지 요건인 시가총액 기준이 40억 원에서 150억 원으로 대폭 상향된다. 시장에 기생하며 자금만 빨아들이는 한계기업을 솎아내야 건전한 자본 흐름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 "2026년은 골든타임 … 정책 지속성이 관건"

    전문가들은 2026년이 자본시장 구조개혁의 '골든타임'이라고 입을 모은다. 금융당국이 추진해 온 '밸류업 프로그램'이 단순한 권고를 넘어, 상법 개정(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과 좀비기업의 과감한 퇴출(상장폐지 요건 강화)이라는 실질적 칼날을 휘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지수 4000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라며 "부실기업을 솎아내고 투명성을 높여 '믿고 투자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것만이 2026년 한국 증시가 살길"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