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합계약 전환 … 당정, 14년 전 재탕 정책으로 기름값 잡기저장탱크 나누고 품질 책임은 누구 몫 … 현장 외면한 탁상공론정유업계 "현장 사정 다른데 적용 의문 … 가격 인하 미지수"
  • ▲ 주유하는 모습.ⓒ뉴데일리
    ▲ 주유하는 모습.ⓒ뉴데일리
    당정이 기름값 인하를 위해 정유업계와 주유소 간 혼합판매계약을 다시 꺼내 들었다. 전속계약 관행을 깨고 시장 경쟁을 유도해 기름값을 인하하겠다는 취지다. 이미 2012년 법이 개정돼 도입됐지만 그렇다고 할 실효성이 없던 정책의 재탕이라는 비판이다. 현장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간과한 탁상공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선 실질적인 유인책과 구체적인 진행 방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0일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전날 국회에서 '주유소·정유사 사회적 대화 상생 협약식'을 열고 정유업계와 주유소 간 협력안을 공개했다.

    협력안에는 정유업계의 사후 정산제를 폐지하고 특정 정유사 제품을 거래한 전속 거래 비중을 60%까지 낮추는 혼합계약 전환이 담겼다. 비율은 당사자 간의 협의를 통해 정하지만, 공급가격이나 거래조건을 차별하지 않도록 했다.

    민주당은 소비자가 한 주유소에서 정유사 제품을 비교하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정유사 간 공급가 경쟁이 촉발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정진욱 을지로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은 "주유소 소비자 패턴이 바뀔 정도로 시장에 변화가 생기고 주유소 간 경쟁이 만들어질 것"이라며 "자연스럽게 소비자 가격이 인하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다르다. 고유가로 여론이 악화할 때마다 등장한 전형적인 재탕 대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는 2012년 7월 관련 법령을 개정해 그해 9월부터 혼합 판매 주유소 제도를 시행했다. 당시 정부는 주유소가 전체 판매량의 50%까지 다른 정유사나 수입사 기름을 섞어 팔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당시에도 시장 안착에 실패했다. 제도의 취지는 혼합판매를 해 가격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 제도 도입 이후 2년 동안 혼합 판매를 하는 주유소는 전무했다. 기름을 섞어 파는 음성적 혼합판매 관행만 남긴 채 유명무실해졌다. 주유소 입장에서는 정유사 브랜드 효과를 비롯해 제휴카드 할인, 장기 거래에 따른 공급가격 인하 등의 기존 혜택을 포기할 유인이 적기 때문이다.

    당시 주유업계 역시 여러 정유사 제품을 취급한다고 해서 매입 단가가 하락할 보장이 없고, 오히려 혼합유 인식이 소비자 신뢰도를 떨어트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 ▲ 주유소 현장 모습.ⓒ뉴데일리
    ▲ 주유소 현장 모습.ⓒ뉴데일리
    인프라와 소비자 혜택 등의 현장 디테일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다. 복수의 정유사 제품에 품질관리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선 물리적으로 저장탱크를 따로 둬야 하지만 공간과 비용 문제로 감당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혼합유에 대한 품질 보증과 책임 소재도 명확하지 않다. 혼합 판매 과정에서 최근 논란이 된 가짜 석유가 유통되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느 정유사의 책임인지 가려내기 어렵다.

    정유업계 역시 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주유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른데 계약 전환을 끌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한 정유 업계 관계자는 "현장은 자 대듯이 딱 떨어져 나오는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주유소마다 사정이나 계약 관계가 다 다르다"며 "합의는 이뤄졌다고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될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제도의 목적인 기름값 인하 효과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업계 관계자는 "유가가 급등하면서 (혼합 판매가) 대두됐으나 실제 소비자 가격 인하로 이어질지는 솔직히 미지수"라며 "카드 결제 수수료 문제나 제휴 카드 혜택 등 얽혀 있는 카드사와 현장의 입장도 조율해야 해 당장 시행하기보다는 충분한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유가 시기에 반복되는 보여 주기 식 '정유사 때리기'를 멈추고 제도가 실효성을 갖기 위한 세밀한 지원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장의 혼란을 막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과 유인책이 없다면 14년 전 제도를 다시 언급했음에도 여전히 탁상공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