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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종로구 청운동 55-15번지. 평소라면 한적했을 이 골목길에는 취재진들과 수행원들로 가득했다. 날씨는 어둑어둑 해졌고 비도 추적추적 내렸지만 취재진들의 열기는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체 이곳은 어디며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곳은 바로 故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생가이자 그 유명한 '청운동 자택'이다. 범(汎) 현대가(家)가 비가오나 눈이오나 매해 3월 20일 저녁 무렵에 ‘총원집합’하는 그 곳이다. 이날은 정 명예회장의 13주기 기일이다.
정해진 집합시간이랄 것은 없지만 이날 현대가는 오후 7시까지 모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후 6시가 넘어서자 빗방울은 더 굵어졌지만 하나 둘 씩 현대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6시 10분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가족이 탑승한 검은색 에쿠스가 먼저 등장했다. 날이 날인만큼 정 부회장의 표정은 엄숙했다. 복장은 검은 정장에 흰 셔츠, 검은 타이를 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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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쯤 지났을까 정일선 비앤지스틸 대표이사 사장도 검은색 에쿠스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현대가 사람들을 태운 에쿠스나 제네시스, 카니발 등 현대·기아차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
시간은 어느 덧 6시 45분을 향했다. 하지만 취재진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는 정 명예회장의 아들들과 며느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그 시점에 회색 카니발이 청운동 자택 골목으로 향했다. 다른 차량은 곧장 청운동 자택으로 직행했는데 이 차량은 중간에 멈춰 섰다. 그리고 검은 정장에 흰 셔츠, 파란색 넥타이에 회색 체크머플러를 두른 키 큰 중년 남성이 내렸다. 바로 정명예회장의 6남이자 서울시장직에 출사표를 던진 정몽준 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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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의원은 "(아버지) 제사인 만큼 정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이해해 달라"며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장충동에서 이곳으로 이사했던 기억이 난다"면서 정 명예회장에 대한 애틋함을 슬며시 드러냈다. 이어 정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내년에 '범 현대가가 함께 행사를 준비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당연히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답해 눈길을 끌었다.
정 의원이 자택으로 들어가고 곧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한복을 입고 기일에 참석한 현 회장 역시 엄숙한 표정이었다.
54분 무렵 검은색 신형 제네시스가 자택에 도착했다. 차에서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자켓 첫 번째 단추를 채우며 내렸다. 정 명예회장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아들인 정 회장을 마지막으로 범 현대가가 다 모인 것이다. 이들은 제사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한 뒤 각자 집으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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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현대가는 최근 몇 년 간 경영권 분쟁과 관련해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다는 세간의 평을 듣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 의원은 내년 '정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과 관련해 얼마든지 범 현대가가 뭉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범 현대가가 정 명예회장의 13주기를 계기로 결속력과 화합을 얼마나 다졌을지 국민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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