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돈 카를로'서 엘리자베타 역으로 평단의 극찬올 하반기 나부꼬 '아비가엘', 카풀레티가와 몬태키가 '줄리엣' 역 맡아
  • ▲ 소프라노 박현주
    ▲ 소프라노 박현주

     

    “Tu che le vanita conoscesti del mondo(세상의 허망함을 아는 당신이여)...”

     

    지난달 23일 저녁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국립오페라단이 무대에 올린 ‘돈 카를로’에서 엘리자베타로 출연한 소프라노 박현주가 4막에서 비련의 아리아를 불렀다.

     

    ‘무덤 속에서 깊은 휴식을 취하고 계신 분이여, 내 고통을 위해 울어주소서. 스페인 땅의 아름다운 정원들아 만일 카를로가 잠시나마 머무르게 된다면...우리의 인연은 끝났고 희망마저도 사라졌네...’

     

    프랑스의 공주 엘리자베타(1545-1568)는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1545-1568)의 약혼녀였다. 그러나 열네 살 때 그녀가 실제로 결혼했던 것은 약혼자의 아버지, 시아버지가 될뻔했던 필립 2세(1527-1598)였다. 왕세자가 약혼녀를 아버지에게 빼앗겼다는 그 비극적인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쓰리게 했고,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적지 않은 소설, 희곡, 영화 등이 탄생했다. 실러의 희곡 ‘스페인 왕자, 돈 카를로스’도 그 중 하나인데, 베르디는 이를 토대로 오페라 ‘돈 카를로’를 만들었다.

     

  • ▲ 오페라 돈카를로에서 나승서(카를로)와 이중창을 부르는 박현주(엘리자베타)
    ▲ 오페라 돈카를로에서 나승서(카를로)와 이중창을 부르는 박현주(엘리자베타)

    오페라 속의 주인공 엘리자베타는 왕비의 지위 때문에 법적으로 아들이 된 돈 카를로에 대한 사랑을 숨기면서 내적으로 괴로워하는 갈등을 노래로 표현해야 하는 고난이도 역할이다.

     

    박현주는 이날 오페라 내내 왕비의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애절한 마음을 담은 아리아들을 연주했다. 특히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4막 아리아는 이날 오페라의 백미(白眉)로 손색이 없었다. 박현주는 중고음을 강하게 표현하다가도 슬픔을 속으로 삭이는 부분에서는 피아니시모(pp)로 끊길 듯 다시 노래를 이어갔다.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는 관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고음을 피아니시모로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노래가 끝나자 관객들은 브라바(Brava)를 연발하며 환호했다.

     

    오페라 '돈 카를로' 공연을 마친 소프라노 박현주를 지난 30일 만났다. 그는 독일의 음악전문가들로부터 ‘동양의 마리아 칼라스’로 평가받는 성악가다. 묵직하면서도 중후한 목소리와 자연스러운 화법은 물론 구슬픈 음색까지도 마리아 칼라스를 빼 닮았다.

     

  • ▲ 소프라노 박현주
    ▲ 소프라노 박현주

     

    정작 박현주는 “현 세기 최고의 소프라노인 마리아 칼라스와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예술적으로는 평생 공부해도 그의 한 부분을 따라갈 수 있을런지 자신이 없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그는 “마리아 칼라스도 좋아하지만 내게 테크닉적인 모델이 된 건 레나타 스코토였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프라노는 마리아 칼라스의 경쟁자로 불리는 레나타 테발디였다”면서 “이들의 음악을 어렸을 때부터 즐겨 들으면서 이태리 특유의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익혀온 것 같다”고 말했다.

     

    박현주는 숙명여자대학교 성악과 출신으로 테너 이순희 교수를 사사했다. 박현주는 “이순희 교수님께서는 노래를 잘 부르는 것에 앞서 ‘말로 노래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면서 “이태리 노래는 말이 곧 노래가 되고 노래가 곧 말이 되는 독특한 구조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호흡과 발성으로 불러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셨고 선생님의 그런 가르침은 아직까지도 내가 노래를 할 때 가장 든든한 근간이 되어 주고 있다”며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박현주는 지난 1998년 오페라 페스티벌 오디션에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소프라노들을 제치고 ‘리골레토’의 질다 역을 따내며 국내 무대에 데뷔했다.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지금까지도 ‘차세대 오페라 스타’라는 말을 듣지만, 실제로는 올해로 데뷔 17년차를 맞은 중견 소프라노다.

     

    박현주는 “2000년부터 10년 간 독일에서 유학하며 90% 이상을 오페라 가수로 활동했다. 프로 성악가로 데뷔한 이래 약 30여편의 오페라로 500회 이상 공연을 했다”면서 “심지어 만삭의 몸이었을 때도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무대에 올라 이리저리 무대를 뛰어다녔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 ▲ 소프라노 박현주

     

    빡빡한 스케줄과 여러 가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박현주가 마음껏 국내외 오페라 무대를 누빌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인 테너 김충희의 역할이 컸다. 최근 부산대 성악과 교수로 부임한 테너 김충희는 박현주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매니저로 활약하고 있다.

     

    박현주는 “남편이 없었다면 독일에서 그처럼 많은 공연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면서 “같은 성악가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든든한 지원군으로서 남편은 가장 큰 힘이 된다”며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그 간 출연해 온 수십 편의 오페라 중 오페라 관객에게 박현주를 가장 뚜렷하게 각인시킨 작품은 ‘노르마’다. 특히 독일 뮌헨 국립극장에서 세계적인 소프라노인 에디타 그루베로바의 ‘노르마’ 커버를 맡아 세계 오페라계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알렸다. ‘노르마’ 역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소프라노는 한국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손에 꼽힐만큼 귀한 존재다. 노르마의 색깔과 화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가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를 국내 무대로 불러온 것도 ‘노르마’였다.

     

    그런 점에서 박현주는 동양의 독보적인 ‘노르마’로 손꼽힌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구사할 수 있는 폭넓은 음악적 세계를 갖춘 것은 물론 노래 실력 또한 최정상급이다.

     

    그는 제 37회 동아콩쿠르 1위, 대한민국 오페라상 여자 성악가상, 독일 베르크하임콩쿠르 1위, 쾰른국제콩쿠르 1위 및 관객상, 일본 시츠오카 국제오페라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쾰른국제콩쿠르와 시츠오카 국제오페라콩쿠르는 박현주 이전까지 1등이 배출되지 않았던 만큼 박현주의 기량은 세계 무대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박현주는 “2009년 국립오페라단에서 ‘노르마’ 역 제의가 들어와 거의 10년 만에 국내 무대에 복귀하게 됐다”면서 “그 후로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카르멘, 루갈다, 돈 카를로 등 다양한 작품으로 국내 무대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

     

    박현주는 “예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 ‘라 보엠’ 무대에 서는 것이 단기적 목표”라면서 “장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목소리가 가라앉다 보니 나만의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을 더욱 넓혀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라 트라비아타'와 '라 보엠'은 종종 연주 요청이 있었지만, 묘하게 다른 연주 스케줄과 겹치면서 아직까지 미답의 무대로 남아 있는 상황.

     

    한편 박현주는 국내에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하기 위해 지난 2012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잡힌 빡빡한 일정만 봐도 그에 대한 오페라계의 기대를 가늠할 수 있다.

     

    오는 10월에는 고양아람누리와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오페라 ‘나부꼬’ 아비가일레 역으로 무대에 서며 그 이후에는 독일에서 오페라 ‘카풀레티가와 몬태키가’의 줄리엣 역을 맡는다. 또 내년 초에는 독일에서 독창회를 열 계획이다.

     

    박현주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늘 밭을 갈러 가는 농부의 심정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 노래하고 싶다”면서 “특히 평생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내 노래로 지친 삶에 위로와 기쁨을 전해주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 ▲ 오페라 돈카를로에서 강병운(필립 역)과 박현주(엘리자베타 역)가 연주하고 있다.
    ▲ 오페라 돈카를로에서 강병운(필립 역)과 박현주(엘리자베타 역)가 연주하고 있다.

     

     [영상] Casta Diva 박현주 http://www.youtube.com/watch?v=xMREpbTXxWY

     [영상] Tu che le vanita 박현주  http://www.youtube.com/watch?v=HXPAn5jgj1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