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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혜성같이 등장해 대한민국 클래식계를 놀라게 한 성악가가 있다. 힘 있으면서도 청아한 목소리, 탄탄하고 깊은 바로크 발성과 풍부한 호흡, 거기다 연기력과 미모까지 두루 갖춘 소프라노 김지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지현은 2010년 제1회 대한민국 오페라페스티벌에서 베세토오페라단 오페라 '카르멘' 미카엘라역으로 국내 오페라 무대에 데뷔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후 '토스카', '라 트라비아타', '춘향전', '일 트로바토레' 등 매년 4~5개의 굵직한 오페라 무대에 주역으로 서며 오페라 '디바'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다음달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공연되는 라벨라오페라단의 오페라 '라보엠' 미미 역에 캐스팅 돼 연습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를 최근 기자가 직접 만났다.
늘 화려한 오페라 무대의 여주인공으로만 만나온 소프라노 김지현의 실제 첫 인상은 '유쾌·상쾌·통쾌' 였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환한 눈웃음, 그리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흘러 넘쳤다.
"제가 좀 잘 웃죠? 다들 놀라요. 목소리도 워낙 큰데다 웃음소리도 커서. 소프라노라고 하면 다들 처음엔 선입견을 갖지만 금세 제 털털한 성격을 알고는 놀라고들 하죠."
타고난 실력으로 어릴 적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 무대에 선 소프라노일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는 자신이 국내 무대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게 된 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
상명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김지현은 대학 졸업 후 무대에 한 번 서보지도 못한 채 일찍 결혼을 하게 됐다. 그 후 아이 셋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몇 년을 보냈다. 그런 그가 다시 음악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싸늘했다고 한다. 아이 셋을 둔 '아줌마'가 소프라노의 꿈을 다시 꾼다는 것은 욕심이라기 보다는 불가능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 꿈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어요. 꿈을 절대 놓지 않았거든요. 나이 서른에 주변의 모든 반대를 무릅쓴 채 아이 셋을 데리고 미국 유학을 떠났어요.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몰라요. 남편의 배려가 컸죠. 남편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힘들때마다 가장 큰 힘이 돼 주었어요. 지금도 저의 정신적 멘토는 남편이랍니다."
김지현은 국내 성악가 중에서는 흔치 않게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그는 미국에서 홀로 육아와 학업을 병행하며 누구보다 혹독한 10년 간의 유학생활을 견뎌냈다. 그때마다 힘이 돼 주었던 건 바로 가족들이었다.
"유학가서 울지 않았던 날이 기억나지 않을만큼 매일매일이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아이들을 기르면서 학교를 다니고 틈틈이 클래식 무대에도 서고 정말 밤을 수두룩하게 샜죠. 한때는 제 몸이 너무 힘들다보니 아이들이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죠. '짐'이 아닌 '힘'이 되는 존재라는걸. 아이들은 고맙게도 공부하는 엄마를 많이 배려해줬어요. 제가 박사학위를 끝낼 때쯤엔 제 논문의 오탈자를 봐주기도 하고 정말 큰 도움이 됐죠."
막상 원하던 학위를 따고나니 그 다음 일이 걱정이었다. 국내 무대 경험이 한 번도 없는 나이많은 '초짜' 소프라노를 누가 무대에 세워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공부는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무섭더라고요. 과연 내가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을까? 누가 날 써 주기는 할까? 그런 두려움이 컸죠. 2010년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1회 오페라 '카르멘' 미카엘라 역이 제 국내 데뷔 무대에요. 그 때 제 나이는 마흔이었어요. 상상도 못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거죠." -
김지현은 국내 데뷔 후 승승장구하며 독보적인 소프라노로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확실히 구축했다. 그는 국내에서 오페라 '리골레토'부터 '토스카'까지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소프라노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만큼 출중한 내공과 카리스마를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이번엔 '라보엠' 미미 역에 도전한다. 라벨라오페라단이 오는 11월 21일부터 2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올리는 오페라 '라보엠'에서 김지현은 테너 지명훈(로돌포 역)과 호흡을 맞춘다. 그동안 '라보엠'에서 무젯타 역은 몇 차례 해 본적이 있지만 '미미'는 이번이 데뷔 무대다. 그는 미미 역을 맡은 것에 대해 '새로운 도전'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번 '라보엠'은 제 스스로도 정말 기대가 큰 작품이에요. 전에도 미미 역 제의가 들어온 적이 있지만 아직은 준비가 안됐다는 판단에 몇 차례 거절했었거든요. 미미는 소리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농익은 소프라노로서의 역할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미미는 제게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죠. 이번에 상대역을 맡은 지명훈 선생님과 호흡이 굉장히 잘 맞아 정말 좋은 무대를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오페라 라보엠은 크리스마스이브 파리를 배경으로 보헤미안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써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아온 푸치니의 작품이다. -
김지현은 '토스카'의 토스카 역, '일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 역, '카르멘'의 미카엘라 역 등 다양한 오페라 캐릭터들을 배역에 꼭 맞게 소화해 내 호평을 받아왔다. 자신의 기량만을 뽐내기보다는 캐릭터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자연스러운 연기와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펼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전 한 번도 노래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작품에 접근한 적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말 그 캐릭터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죠. 이번 미미 역을 준비할때도 어떤 발성과 어떤 연기가 가장 미미스러울지에 대해 고민해요. 그동안 보여드렸던 무젯타와는 완전히 다른 저만의 미미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소프라노 김지현의 '미미'가 더욱 기대되는 대목이다. 김지현은 '라보엠' 공연 후 내년쯤에는 독창회를 열 계획이다. 그동안 국내 무대에서 갈고 닦은 기량을 여한없이 보여줄 것이라는 그의 이야기에 클래식계의 기대가 크다.
김지현은 최근 미국 하우드(Harwood) 매니지먼트와 전속 계약을 맺고 해외 진출 준비도 마친 상태다. 국내 최정상급 소프라노가 자신의 재능을 해외로 역수출하게 된 것이다. 그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영국 코벤트가든, 이탈리아 라 스칼라, 오스트리아 빈 슈타트오퍼 등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에 오를 날이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음악은 점수나 등수가 나오는 분야가 아니에요.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마음을 울려야하는 직업이다보니 그래서 더 힘들때가 많죠. 겉으론 화려해보이지만 현실적으로 경제적 풍요나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 직업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모든 걸 뛰어넘을 열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고생을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고 즐기다보면 언젠가는 '1등'이나 '100점'을 뛰어넘는 가치를 분명히 만들어낼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
소프라노 김지현의 최종 목표는 '밸런스를 잘 맞추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다. 현재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 오페라 가수이자 후임들을 양성하는 교수로 1인 다역을 맡고 있는 김지현은 이 모두의 밸런스를 잘 맞춰 모든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저는 티칭(수업)과 연주를 공유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어느 하나에만 치우치지 않고 모두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커요. 무대에서는 실력을 갖춘 오페라 가수로, 강단에서는 학생들에게 좋은 선생님으로, 가족들에겐 따뜻한 아내이자 엄마로 평생 기억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소프라노 김지현은 특유의 긍정 에너지가 가득 담긴 여운을 남기고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은 '세상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죠. 전 세상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일도 있지만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가 있을때도 있으니까요. 만약 생각대로만 세상일이 벌어졌다면 제가 유학을 갔을 수도 없었을테고 오페라 가수가 될 수도 없었을거에요. 모든 일에 대해 한정을 짓기보다는 '세상일은 절대 생각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내다보면 꿈꾸는 것 이상의 것을 이룰 수 있을거에요. 저 처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