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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환율전쟁이 시작됐다.
세계 각국이 자국의 경기부양을 위해 돈풀기에 나서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중앙은행들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이 "양적완화와 초저금리에 기댄 경기부양책은 잘못된 안정 심리에 빠지게 한다"고 경고까지 하고 나섰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한정 달러를 쏟아부었던 미국은 톡톡한 성과를 거둔 뒤 금리인상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여전한 디플레이션에 허덕이는 일본 통화 당국은 연간 최대 20조엔에 달하는 추가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지난해 4월 60조~70조엔의 통화량 확대에 이어 또 다시 돈 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일본과 디플레이션 탈출 경쟁을 벌이는 유럽과 성장이 둔화된 중국마저도 당장은 아니라도 역시 돈 풀기 경쟁에 가세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요동치는 국제금융시장의 변화는 고스란히 한국경제에 충격파를 던진다. 환율과 증시가 출렁이고 수출이 직격탄을 맞아 가뜩이나 더딘 경기회복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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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저폭탄...100엔=900원대 초읽기가파른 엔화 약세에 국제 외환시장은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달러 강세와 맞물린 엔저현상으로 엔ㆍ달러 환율은 7년만에 114엔까지 치솟으며 연일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연말이나 내년초에 115엔, 내년말에는 125~130엔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원ㆍ달러 환율도 장중 한때 11원 넘게 치솟았으며 5일 현재 1072.6원까지 올랐다. 반면 원ㆍ엔 환율은 하루 10원 이상의 낙폭을 보이며 무섭게 하락해 100엔당 950원선도 붕괴됐다.
이미 수출업체들은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일부 연구기관에선 내년중 800원까지 갈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엔저로 인한 수출 타격 우려에 무려 5.88% 급락한 현대차는 한국전력 부지 매입 이후 한 달 반 새 시가총액 8조원 이상이 증발돼 코스피 2위 자리까지 내놓은 상태다.
엔저 여파가 고스란히 전해진 국내증시는 하락세를 이어가면서 1930선을 간신히 지키고 있다. 엔저에 따라 일본 연기금 등 외인자금 유입에 대한 기대섞인 전망도 없진 않지만 미국이 내년 금리이상을 단행할 경우 코스피는 또다시 크게 출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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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대 수출품목중 55개 타격
엔화 가치의 하락은 특히 우리나라 수출기업에는 치명적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은 높아지는 반면 한국산은 그만큼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한국 수출 상위 100대 품목 가운데 일본과 겹치는 게 55개에 달하며 수출 비중은 무려 54%다. 일본 기업들이 한국과 경쟁하는 제품의 수출 가격을 내릴 것은 자명한 일이다.벌써 엔저(低) 여파로 현대ㆍ기아차의 수출증가율이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 반도체와 전기전자,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대부분 업종 상황이 비슷하다.
여기에 턱밑까지 쫒아온 중국의 공세로 수출 기업의 영업이익이 곤두박질 치면 수출로 활로를 열어가는 우리 경제는 힘 쓰기가 어렵게 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원·엔 환율이 100엔당 950원대로 진입하면 수출이 4.2% 감소하고 900원까지 내려가면 8.8% 급감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엔화 약세만해도 감당하기 버거운 판에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의 경기는 완연히 둔화조짐이고 유럽의 경기도 예상보다 회복세가 더뎌 수출 전망이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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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주한 당국...뾰족한 수단은 없어
엔저 공세에 적극 대응할 뾰족한 방안은 사실 마땅치 않다. 일본이나 미국처럼 돈을 풀 수도 없는 입장이고 외환 시장 개입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국과 일본이 정반대의 행보를 걸으니 선택할 수 있는 카드도 매우 제한적이다. 엔저에 맞서 추가 금리 인하 등 돈을 푸는 정책을 택하자니 내년 중반 전후로 예상이 되는 미국의 금리 인상이 부담이다. 미국과의 금리차가 좁혀지면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자본이 급격히 이탈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우리 경제의 뇌관인 가계부채 악화와도 직결돼 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자니 엔저의 공세로 대 중국 수출 등에서 심각한 타격을 감내해야 한다.
일단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 관계 당국은 엔저 심화가 수출 등 실물경제와 금융시스템 안정에 미칠 영향을 점검하며 사태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일본의 추가 양적완화 조치,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와 함께 중국과 유럽의 경제전망도 밝지 못해 대외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며 경제동향 점검과 리스크 관리를 주문했다. 최 부총리는 "경제 회복세가 미약한 상황에서 대외 불확성이 커지면서 경제운용 방향을 잡기 어렵다"며 곤혹스러운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경제 수장이 위기를 강조하면 동요가 일 것을 염려한 신중한 발언이지만 초조감이 가득 묻어난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일본은행의 추가 양적완화가 시장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왔다"며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지가 최대 관심사로 가장 큰 부분은 환율"이라고 말했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도 국회 연설에서 "저성장, 저물가, 엔저라는 신3저의 도전을 맞아 여전히 위기"라며 엔저에 대한 우려감을 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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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계 "경제활성화 법안 등 모멘텀 강화해야"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엔저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대내외 상황을 고려해 정부와 기업은 유효 적절한 대응책을 세워 나가야 한다. 당장은 내수 살리기에 더 힘을 모아야 한다. 또 장기적으로는 부품소재산업 등 전략 산업의 경쟁력도 키워야 한다.무엇보다 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확보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정부는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규제완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기업은 혁신을 통해 내수와 수출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전경련이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기업경기실사지수(BSI)가 오랜만에 100을 상회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딱 중간 정도의 전망치다.
전경련 김용옥 경제정책팀장은 "정부의 지속적인 확장적 거시경제정책과 미국경제 회복세 등의 긍정적 요인과 엔저현상 심화 등 부정적 요인이 혼재돼 경기전망이 보합세를 기록했다"며 "아직 국내 경기 회복세가 미약한 만큼 외환시장의 안정 및 경제활성화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통해 경기 회복의 모멘텀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누리당 정우택의원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시장변동성이 커지는 만큼 한미간 통화스왑 계약 재체결 등 적극적인 외환정책을 구사하고 중국을 근원지로 한 역내금융질서의 재편과 관련해 새로운 금융 국제화 전략 수립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정의원은 또 금융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금융당국이 국내 IT 기업의 금융업 진출과 인터넷 전문은행 설립을 허용할 것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