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 공동화로 생존권 위협SH공사 수년간 '혈세' 1600억원 투입
  • ▲ 세운 4구역 주민들이 개발사업을 둘러싼 유관기관의 의견 대립과 책임 회피에 항의하고 있다.ⓒ세운4구역 주민대표회의
    ▲ 세운 4구역 주민들이 개발사업을 둘러싼 유관기관의 의견 대립과 책임 회피에 항의하고 있다.ⓒ세운4구역 주민대표회의


    "2004년 개발이 발표된 후 지금까지 진행된 게 없다. 사람들이 떠나면서 상가는 공동화됐고 개발지구로 묶이면서 재산권 행사도 못 하고 있다. 이젠 서울시나 종로구청이 사업 진행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세운4구역 주민대표회의 관계자)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내 세운4구역 개발이 계속 늦어지면서 주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세운4구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 맞은편에 있는 종로구 예지동 85번지(구역면적 3만3262.9㎡) 일대다.

    지난 7일 세운초록띠공원에서는 세운4구역 주민들의 재정비 촉구 시위가 벌어졌다. 주민들은 피켓과 현수막 등에 세운4구역 관할 기관인 종로구청과 개발을 계획한 서울시에 대한 실망감을 나타냈다.

    세운4구역 주민대표회의 관계자는 "종로구청은 세운4구역 내 교통섬을 가지고 딴지를 걸고 있다"며 "서울시는 종로구청을 설득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고 성토했다. 이어 "이전 수장들이 구상한 사업이어서 서울시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 ▲ 세운 4구역 상가는 평일 낮임에도 문을 닫은 점포가 훨씬 많았다.ⓒ뉴데일리경제
    ▲ 세운 4구역 상가는 평일 낮임에도 문을 닫은 점포가 훨씬 많았다.ⓒ뉴데일리경제


    또 주민들은 세운4구역 개발 지연 때문에 생존권까지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귀금속·시계·전자 등 수많은 점포들이 있었던 세운4구역은 평일 낮에도 점포 대부분이 문을 닫을 정도로 상권이 위축됐다.

    다른 주민대표회의 관계자는 "주민들이 개발을 원한 것도 아닌데 손해만 입었다"며 "지급이자, 대체 이주 상가 임대료 등 고정비 손해가 월 2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한 주민은 "골목이 너무 한산해 저녁에 걸어 다니기 어려울 정도"라며 "서울시와 종로구청이 책임감을 가지고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전했다.

  • ▲ 오세훈 시장은 북한산부터 관악산까지 녹지로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사진은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과 세운4구역 위치도.ⓒ문화재위원회 심의록.
    ▲ 오세훈 시장은 북한산부터 관악산까지 녹지로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사진은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과 세운4구역 위치도.ⓒ문화재위원회 심의록.


    세운4구역의 비극은 2004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이 지역을 공영개발지역으로 지정하면서 개발 논의가 이뤄졌다.

    오세훈 시장이 취임한 2006년에는 세운상가 일대가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됐다. 북한산~종묘~남산~국립묘지~관악산을 녹지로 연결하는 '녹지축 조성 계획'의 일환이었다.

    서울시는 세운4구역 옆에 있는 현대상가를 철거하고 세운초록띠공원을 만들기로 했다. 사업 비용 약 1000억원은 세운4구역 토지 소유주에게 부담시킬 계획이었다. 대신 세운4구역에서 개발 가능한 건물의 최고 높이를 90m에서 122.3m로 올려 사업성을 높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관인 이코모스(ICOMOS)는 건물 최고 높이대로 개발이 진행되면 세운 4구역에서 약 200m 거리에 있는 종묘의 스카이라인이 훼손된다고 경고했다. 종묘가 세계유산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우려도 표명했다.  

    하지만 문화재 인사들의 권고에도 건물 최고 높이는 유지됐다. 2009년 5월 발간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그 과정의 기록'에 따르면 이건기 서울시 건축과장이 "외국 자문가들이 문제만 지적했다"며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2007년 9월에는 사업 시스템 구축과 재원 조달 등의 이유로 사업시행자가 종로구청장에서 SH공사로 변경됐다. SH공사는 대체 이주 상가 등으로 현대상가와 세운 4구역 상인들을 이전시켰다. 

    SH공사 관계자는 "당시 사업성이 충분하다고 판단돼 사업 일정을 앞당기기 위해 이주를 서둘렀다"고 설명했다.  

  • ▲ 세운 4구역은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인근에 있어 개발이 계속 지연돼 왔다. 사진은 세운4구역과 종묘와의 거리를 표시한 지도.ⓒ문화재위원회 심의록.
    ▲ 세운 4구역은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인근에 있어 개발이 계속 지연돼 왔다. 사진은 세운4구역과 종묘와의 거리를 표시한 지도.ⓒ문화재위원회 심의록.


    2009년 4월 SH공사는 세운4구역 사업시행인가를 종로구청에 신청했다. 하지만 이 사업안은 문화재청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새로 들어설 건물이 종묘 경관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재청은 지난해 건물 최고 높이를 71.9m로 낮춰 조건부 승인했다. 12차례에 걸친 심의가 이뤄진 5년 동안 개발은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 떠나지 못하고 남은 주민들의 손해는 계속 불어났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벽을 넘자 이번엔 SH공사와 종로구청이 세운 4구역 내 교통섬을 두고 이견을 보여 사업이 난관에 부딪힌 상황이다.   

    SH공사는 교통섬을 개발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반면 종로구청은 교통섬을 세운 4구역에서 제외해 유지하자고 주장한다.

    SH공사 관계자는 "지난 7월 말까지 투입된 영업보상, 각종 용역비, 금융비용 등 사업비가 1612억원에 이른다"며 "이미 건물 높이도 낮아졌는데 교통섬까지 제외되면 사업성이 더 떨어진다"고 말했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교통섬을 없애고 나면 다른 교통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개발 계획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서울시나 SH공사와도 계속 논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종로구청 뜻대로 교통섬을 정비지구에서 제외하려면 서울시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보행자 중심의 도로체계를 만들기 위해 종로와 을지로의 교통섬을 없애겠다는 것이 시의 방침"이라며 종로구청과 상반된 입장을 밝혔다.

    세 기관 모두 "사업 중단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견해 차이로 여전히 개발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 세운 4구역 주민들의 고단함도 점점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