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 입장 번복… 9일 5억달러 행사"시장 혼란" 사과… 모회사 태광그룹도 지원 "합리적 선택" 쉴드 치다 파장 커져
  • ▲ ⓒ흥국생명
    ▲ ⓒ흥국생명
    흥국생명이 결국 당초 계획대로 5억달러 규모 외화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권(콜옵션)을 행사하기로 했다. 시장 불안에 대한 염려가 커진데 따른 번복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여준 흥국생명과 금융당국의 미온적인 대응은 두고두고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신용과 평판 훼손은 물론 그간 공고히 쌓아온 시장신뢰를 크게 흔들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콜옵션 미행사 결정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두둔했다가 다시금 행사를 독려하고 나선 당국의 오락가락 대응은 여러 뒷말을 낳고 있다.

    8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전날인 7일 싱가포르거래소(SGX)에 기존 일정대로 오는 9일 5억 달러 규모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을 행사한다고 공시했다. 지난 1일 콜옵션 행사 연기를 공시한 지 6일 만에 결정을 번복한 것이다.

    흥국생명은 이날 오후 늦은 시각 보도자료를 통해 "최근 조기상환 연기에 따른 금융시장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콜옵션 행사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모회사인 태광그룹의 자본확충 지원 계획도 밝혔다.

    콜옵션 행사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인 4000여억원은 흥국생명이 환매조건부채권(RP)을 발행해 4대 시중은행이 매입하는 방식으로 조달한다. 아울러 다른 보험사들도 일부 대출을 해주는 방식으로 자금 지원에 나선다. 이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흥국생명은 보도자료 말미에 "콜옵션 연기 결정으로 인해 야기된 금융시장 혼란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적었는데, 사실 사과해야 할 당사자는 흥국생명뿐만이 아니다. 금융당국도 이번 사태를 키운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 ▲ 이복현 금감원장.ⓒ연합뉴스
    ▲ 이복현 금감원장.ⓒ연합뉴스
    당국은 지난 1일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 공시 이후 논란이 일자, 2일 보도자료를 통해 "그간 금융위·기재부·금감원은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권 행사와 관련한 일정·계획 등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소통해왔다"며 딱히 문제될 게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흥국생명은 조기상환권 미행사에 따른 영향과 조기상환을 위한 자금상황 및 해외채권 차환 발행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며 "채권 발행 당시의 당사자간 약정대로 조건을 협의·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2009년 우리은행 이후 무려 13년 만에 콜옵션 미행사 사태가 벌어진 것을 두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금융당국의 설명에 국내외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날인 3일엔 DB생명이 300억원 규모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 행사일을 내년 5월로 변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이 때에도 당국은 "이번 DB생명 신종자본증권 투자자는 소수이며 시장에 유통되는 물량이 아니므로 채권 유통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없다"고 말했다.

    흥국생명과 DB생명의 연이은 콜옵션 연기 사태에 한국물(Korean Paper) 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당장 흥국생명의 액면가 100달러짜리 신종자본증권의 가격은 콜옵션 행사 포기 선언 하루 전날인 지난달 31일 99.7달러에서 4일 72.2달러로 약 28% 급락했다.

    같은 보험사인 동양생명의 3억달러 규모 신종자본증권(2025년 9월 만기)도 같은 기간 83.4달러에서 52.4달러로 37% 하락했다. 타 금융사에도 영향을 미쳐 내년 8월 콜옵션 만기인 신한금융지주의 신종자본증권은 같은 기간 96.6달러에서 91.5달러, 2024년 10월 만기 우리은행 신종자본증권도 87.5달러에서 77.8달러로 떨어졌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4일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로 한국 보험사들의 자금조달 여건이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험사와 당국의 오락가락 행태로 인해 국가적 손실이 발생한 셈이다.

    이와 관련, 금융권 관계자는 "흥국생명도 문제지만, 콜옵션 미행사 계획을 사전에 인지했음에도 시장에 미칠 파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금융당국의 책임도 크다"며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당국이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