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 비싼 이자" 금융계급제론 … 은행 이익으로 금리 낮추기 압박데이터 비켜간 진단에 시장 혼선 … 취약계층 지원, 재정보증·설계 논의 빠져
  • ▲ 이재명 대통령ⓒ연합뉴스
    ▲ 이재명 대통령ⓒ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가난한 사람이 비싼 이자를 강요받는 이른바 금융계급제를 깨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금융권 전반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대통령 발언 직후 금융위원회가 주요 금융지주 임원 소집을 예고, ‘포용금융’ 계획을 다시 꺼내 점검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전 업권을 향한 압박 모드가 가동된 모습이다.

    취약계층의 이자 부담을 줄이겠다는 정책 목표에 이견은 없지만, ‘계급제’ 구조 사이에 개념적 간극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구체적 설계 이전에 강한 구호가 먼저 제시될 경우 시장 신호가 왜곡되고, 금융기관의 위험관리 기준에도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


    ◇ “금융계급제 깨야” 이후 … 포용금융 총동원, 민간 이익 동원 시그널

    이 대통령은 지난 13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현재 금융 제도는 가난한 사람이 비싼 이자를 강요받는 등 이른바 금융계급제가 된 것 아니냐”며 “기존 사고에 매이지 말고 해결책을 마련하고, 금융기관도 공적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책 신호는 곧바로 금융권으로 향했다. 금융위는 5대(KB·신한·하나·우리·NH농협) 금융지주가 앞으로 5년 동안 생산적·포용금융에 공급하기로 한 508조원 가운데 포용금융 배정액 약 70조원을 어떻게 집행하고 있는지 점검에 나서기로 했다. 각 지주에 서민·취약차주 대출, 상생 프로그램, 자체 서민상품 실적을 구체적으로 보고하라는 취지다.

    정책 서민대출 금리 인하도 병행된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햇살론 예산 1067억원 증액안을 처리했고, 금리는 기존 연 15.9%에서 12.9%, 사회적 배려계층의 경우 9.9%까지 낮추는 방향이 추진되고 있다. 동시에 금융당국은 업권별로 중·저신용자 대출 확대, 대안신용평가(CSS) 적용 범위 확대, 자체 서민상품 개발 등의 기능 강화를 요청하고 있다.

    ◇신용점수는 ‘계급 점수’가 아니다 … 데이터와 어긋난 ‘금융계급제’ 프레임

    논란의 핵심은 대통령이 사용한 ‘금융계급제’라는 규정이 실제 국내 신용·금리 구조를 제대로 설명하느냐에 있다.

    국내 주요 개인신용평가회사(KCB·NICE평가정보 등)의 모형을 보면, 신용점수는 대체로 대출·카드 이용 패턴, 부채 규모, 상환 이력, 신용거래 기간, 일부 비금융·마이데이터 정보 등을 조합해 산출된다.

    소득은 일부 금융사가 자체 내부모형에서 참고 변수로 활용하기는 하지만, 공식 신용점수 산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은행권이 “신용은 ‘얼마 버느냐’보다 ‘빌린 돈을 얼마나 성실히 갚았느냐’를 보는 지표”라고 설명하는 이유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천하람 의원실이 신용평가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소득 상위 30% 가운데 신용점수 840점 이상 고신용자가 약 674만명, 소득 하위 30%이면서 고신용자인 사람도 202만명 수준으로 집계됐다. 반대로 신용점수 664점 이하 저신용자만 떼서 보면, 소득 상위 30%에 속한 인원이 42만6000명으로 소득 하위 30% 저신용자 33만7000명보다 오히려 많다.

    소득과 신용 사이에 상관관계는 존재하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자동으로 고금리를 강요당하는 구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개인의 금융거래 이력과 부채 관리 행태가 신용도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해외 사례도 비슷하다. 미국에서 널리 쓰이는 신용평가(FICO) 점수는 상환 기록, 한도 대비 사용액, 신용거래 기간, 신규 대출, 대출 구성 등 다섯 가지 요소에 가중치를 둬 신용을 평가한다. 이 과정에서 소득·자산은 직접 변수로 포함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책 최고 책임자가 금융구조를 ‘계급제’로 규정할 경우, 원래 위험도와 상환 이력을 기준으로 작동하는 위험기반 가격체계가 계층·소득 구도로 단순화되는 정치적 메시지로 읽힐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정책 논의의 출발점이 데이터와 구조 진단이 아니라 ‘계급’ 구호에 맞춰 설정될 위험이 있다.
  • ▲ ⓒ챗GPT
    ▲ ⓒ챗GPT
    ◇금리를 재분배 도구로 쓰면 … 건전성·배임·금융배제 리스크 한꺼번에

    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고신용자의 대출금리를 다소 올려 저신용자 금리를 낮춰야 한다”, “금융권에서 차곡차곡 쌓은 이익을 나눠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내놓았다.

    취약계층 부담 완화라는 명분은 명확하지만 이를 금리와 수익 구조에 직접 적용할 경우 금융시장 기본 원리와 충돌할 소지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우려다.

    대출금리를 계층·소득 기준으로 인위적으로 조정할 경우 위험 수준에 비해 금리를 과도하게 낮춘 차주군에서 연체율·부실률이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또 금융사는 발생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다른 차주군에 금리·수수료를 전가하려는 유인을 갖게 된다.

    특히 위험에 상응하는 가격을 받지 못하는 구간의 차주는 아예 취급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대출 한도가 크게 줄면서 오히려 금융배제가 심화될 수 있다.

    은행권에서는 “저신용층 금융지원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금리를 재분배 수단처럼 쓰라는 요구는 자칫 건전성을 흔들고 경영진 배임 논란까지 부를 수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목표에는 공감하지만 … 금리통제가 아니라 리스크 분담 설계 필요”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문제의식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수단 선택을 둘러싼 위험을 지적했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이 대통령의 발언에 공감하는 바가 있고, 취약계층의 이자부담을 완화하겠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며 “이는 포용금융의 핵심 목표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 수단으로 금리를 계층별로 다르게 하는 방식을 사용할 경우, 시장 원리에 기반한 리스크 관리체계가 흔들리면서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며 “금리는 차주의 신용위험·부도확률·자본비용을 반영해 결정되는데 이를 행정적으로 왜곡하면 은행은 자연스럽게 심사 기준을 강화해 가장 취약한 계층부터 배제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정책 개입 방식과 관련해서도 그는 “이를 막기 위해 정책이 더 깊게 개입하면 관치금융이라는 부작용과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동시에 부를 수 있다”며 “아직 한국 금융기관이 이런 압력을 흡수하면서도 자율성과 책임성을 유지할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박 이코노미스트는 국제 사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국제적으로는 취약계층 지원을 위해 정부의 금리 보전(이차 보전), 부분보증, 신용정보 개선, 채무조정 프로그램 등을 활용해 차주의 위험 자체를 낮추는 방식이 주류”라며 “금리를 억지로 낮추는 것이 아니라 정부·사회·금융이 리스크를 나눠 떠안는 구조가 금융시스템 안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가장 지속가능한 포용금융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대출 목적 구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생계 목적 대출과 투기·자산확대 목적 대출이 동일 기준에서 지원될 경우 정책의 본래 취지가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생계형 대출의 경우 정부의 금리 보전, 신용보증, 채무조정 프로그램 가동 등을 통해 정책적 지원(포용금융)을 설계할 여지가 있고, 이때 취약계층이 실제로 혜택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